요한을 통해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요한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머 리 말

 

요한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정체성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으며, 부활과 성령세례,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적 전쟁에 대해서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요한이 작성한 성경은 요한복음, 요한일서, 이서, 삼서, 계시록의 다섯권이다.

요한복음은 두 가지 사명을 동시에 가진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동시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오실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동시에 이방인에게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되신다는 그분의 신성에 관한 메시지를 전한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타나내는 분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분으로, 부활의 생명을 주는 분으로 묘사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영적 상태와 율법 아래 놓여 있었던 제자들에게 부활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부활의 몸을 직접 보이시고, 성령을 주셔서, 그들에게도 현재적 부활을 믿게 하셨다. 나아가 오늘날 요한이 작성한 글을 읽는 성도에게도 현재적 부활을 알려주신다.

부활의 성도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며, 하나되는 의미를 형제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형제 사랑은 결국 죽었던 영을 살리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 같은 사명을 주시고,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다.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성도 역시 예수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현재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부활하였음을 믿게 하는 것이다.

특히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교회의 시대에 일곱 교회의 특징을 오늘날 교회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리소드이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해서도 설명한바, 이는 성도의 심령 속에 이루어지는 재림과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영적 전쟁은 사탄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라는 육적 자아와 거지스 선지자들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마지막 때 적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해서는 자기 속의 육적 자아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성경이 왜곡되는 것은 인간의 눈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이 왜곡되어, 거짓선지자를 만든다.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가 임재하게 되는 것이다.

 

 

2024. 4.

 

진리의 선교회

 

 

 

목 차

 

 

1.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1

 

. 말씀속에서 역사하시는 분

1. 세상의 빛/ 1

2. 영생의 말씀/ 3

3. 진리와 자유/ 5

4. 선한 목자/ 8

5. 길이요 진리요 생명/ 10

 

.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분

1. 아들의 권한/ 12

2. 왕의 아들의 신하를 살리시다/ 17

3. 병든 자를 치유/ 21

4. 오병이어의 기적/ 24

5. 날때부터 맹인된 자를 고치시다/ 26

6.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다/ 31

7. 바다 위를 걷다/ 33

 

. 율법을 완성하시는 분

1. 세례요한의 증언/ 35

2. 가나혼인잔치/ 38

 

 

. 부활생명을 주시는 분

1. 하늘로부터 오는 이/ 43

2. 나는 부활이요 생명/ 45

3. 생명의 떡/ 48

4. 니고데와의 대화/ 52

5.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55

 

2. 예수님의 가족과 제자들의 영적 상태와 성전 청소/ 58

 

. 예수님의 가족과 제자들의 영적 상태

1. 육신의 형제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다/ 58

2. 두 제자/ 59

3. 예수를 파는 유다/ 62

4. 베드로의 예수 부인/ 63

5. 도마의 의심/ 64

 

. 성전 청소

1. 성전의 타락과 돌성전의 무너짐을 예고/ 64

2.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 69

 

. 율법 아래 있는 자의 영적 상태

1. 율법 아래 있는 자의 모습/ 70

2. 간음한 여인/ 73

3. 계명을 지키는 의미/ 76

4. 죄인과 의인/ 78

 

3.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82

 

.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1. 대속의 죽음의 의미/ 82

2.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다/ 86

3. 수난과 십자가/ 89

 

. 그리스도의 부활

1. 부활/ 95

2. 제자들에게 부활의 몸을 보이다/ 104

3. 성도들에게 현재적 부활이 이루어지는 모습/ 108

4. 부활의 몸이란/ 111

 

4. 승천과 성령세례/ 115

 

. 승천

1. 그리스도의 승천/ 115

2. 요한의 승천/ 117

 

. 세례

1. 물과 성령과 피/ 119

2. 물세례/ 120

3. 피의 의미/ 121

3. 성령세례/ 122

 

 

. 하나가 되는 것

1. 겟세마네 기도/ 124

2. 포도나무와 가지/ 128

3. 제자의 발을 씻기시다/ 130

 

5. 복음전파와 성도들의 위로/ 134

 

. 복음 전파

1. 내양을 먹이라/ 134

2. 일곱 교회의 모습/ 136

3. 적그리스도의 출현/ 142

4. 거짓선지자와의 전쟁/ 145

 

. 성도들의 위로

1. 세상을 이기는 것/ 147

2. 보혜사/ 149

3. 천년왕국/ 131

 

.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 대한 재림/ 154

2.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에 대한 심판/  156


1.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 말씀 속에서 역사하시는 분

 

1. 세상의 빛

요한복음 1 4-13절『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사람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이 세상 사람들의 반응은 분명하게 나뉘어졌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죽음의 절망가운데 있던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주신 생명의 주인되심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빛되신 구원자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미리 한 사람을 선택하여 보내심으로 장차 오실 빛, 구원자에 대하여 선포하도록 하였다. 이 일을 맡은 요한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목적 즉, 자신은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성실히 맡겨진 일들을 감당해 나갔다.

빛이 아니고 빛에 대해 증언하러 온 자』자신을 소개하는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겠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빛이 되어 주목받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해준다. 창조주이시고,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다 이제 인간의 몸을 입고 직접 창조하신 그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 분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대속:십자가의 죽음) 이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부활생명)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던 인간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와 연합된 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현재적으로 부활되었음을 믿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현재적 부활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해 주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할 때, 그리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인간은 나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나에게 유익을 주는 것에 목표를 세우고 삶을 살아가게 된다. 세상의 중심에는 바로 내 자신이 있었고, 자기 중심의 굴레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음에도 이러한 삶의 모습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삶이라 여기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내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죄인인지,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강하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참으로 연약하고, 초라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나의 힘으로는 내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비로소 깨닫고, 내가 아닌 외부의 도움으로 나의 연약함과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고,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그리스도 한 분만이 나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의 몸이 죽고, 다시 부활의 새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2. 영생의 말씀

요한복음 6 61-64절『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살리는 분은 성령이시고, 살리는 대상은 죽은 영이다.  죽은 영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을 가둔 육적 몸(옛사람)이 죽어야만 한다. 영이 죽은 상태를 옥에 갇힌 자, 눈먼 자 등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갇힌 자를 풀어주고, 눈먼 자의 눈을 뜨게하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흑암에 있는 자를 빛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자는 이런 은혜를 받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기 위해서는 예수와 함께 옛사람이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이 세상에 아들을 보내시는데, 인간은 이사야 53장에서『너희는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한복음 12 39-40절에서『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라고 하셨다.

로마서 6 6-7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옛사람이 성도의 심령 속에 있는 옛성전을 의미한다. 옛성전(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신도가 의롭다 하심(부활:새성전)을 얻는 것이다. 신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을 때, 그의 죄가 예수의 피로 죄 용서 받는 일이 일어난다. 피는 인간의 죄를 해결한다. 그러나 옛사람(자아:)은 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적으로 죽은 자를 부활시켜 주신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피를 흘리고 살을 태우는 의미를 갖는다. 죄인이 이렇게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는 세상 죄를 고백하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내가 회개하고 믿으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어야 할 존재이므로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어, 예수 안에 있으면, 부활생명으로 구원받는다. 사람들은『구원이 왜 이렇게 복잡해, 그냥 믿으면 되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십자가의 말씀에 이르지 못하면 자기의 믿음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믿음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예수의 믿음은『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부활시키는 믿음』이다. 자기를 포기하고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3. 진리의 자유

요한복음 831-32절『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미리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결하는 줄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예수님께서 말씀가운데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것이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그래서 로마서 6 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하고 있다.

죄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이 죄다.『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살게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말씀 속에서 이처럼 인간이 죄 가운데서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여러 번 반복하시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존재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죽었던 영을 살리는 일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 63절에서『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는 하나님 말씀이 거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편리하게 생각하겠끔 와전시키고, 거짓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영접기도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거짓복음을 퍼뜨리는 것이다. 자기들이 만드는 기독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부활생명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식으로 배우고 경험하고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처럼 생각하지만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생명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거짓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기독교에 속아서는 안된다.

세상 나라에 적응된 기독교로서는 부활생명으로 거듭날 수 없다. 세례가 죄를 씻는 것으로 말하는 기독교로는 거듭날 수 없다. 로마서 6 4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며, 베드로전서 3 21절에서『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세례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는 것이다. 신도가 물세례(죄에 대해서 죽음), 불세례(혼에 대해서 죽음)를 통과하면, 하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 성령세례는 부활생명이다. 죄인이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면 예수의 피로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로마서 6 7절에서는『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라고 말한다. 성경이 왜곡된 것이 아니라, 거짓선지자들이 성경을 왜곡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왜곡하여 말하고 있다. 그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신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 죽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신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알고 있어도, 말씀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육적인 옛사람을 벗고 하늘로부터 신령한 몸을 입은 새사람(부활생명) 만이 참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도는 거짓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 1-5절『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님이 요한복음 9장에서, 바라새인들을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맹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실천한다고 하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사실 영적 맹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안식일을 준수해야 한다는 잘못된 명분"에 빠져, 안식일의 참된 정신, 곧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의 율법 준수는 사람들을 세워주는 의의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찌르는 폭력의 도구로 전락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이런 배경으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설명하신다. 『너희들이 어리석은 백성들의 지도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너희들이야 말로 도둑이자 강도와 진배없다. 너희들은 생명의 문으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주 강한 어조로 바리새인들을 향해  비난을 퍼붓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알고 따라간다"고 말씀하셨다.

이 표현은 9장의 맹인과 예수님의 관계를 떠올리게 해준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눈을 떴다는 사실보다, 그를 치료해준 이가 불법을 저질렀다는 점에 더 격분했다. 그리고 그들은 맹인을 출교시키고 말았다. 그들은 맹인의 목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맹인은 자신을 고쳐준 예수님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를 믿는 자신의 믿음을 시인하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맹인의 참된 목자는 에수님이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도,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지 못했다. 이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예수님은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양의 목자는 문으로 들어간다』고 하셨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이 진정으로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싶은 거냐? 그렇다면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베푸는 구원을 받아들이고 나에게 배워라.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임을 자처하는 그들"에게, 참된 리더십이 무엇인지 이렇게 일러주고 계시는 것이다. 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는 분명하다. 삯꾼에게 양은 자기 양이 아니다. 그는 양을 치고 삯을 받는다. 삯군 목자는 늑대가 오면 목숨을 걸고 양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저 살기 위해 양을 버리고 달아나버린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린다. 삯꾼은 삯을 위해 양이 필요하지만, 참된 목자는 양을 위해 자신이 있어야 함을 안다. 참된 목자와 양 사이에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이 목자와 양간의 영적인 하나됨을 말한다.

 

5. 길이요 진리요 생명

요한복음 146-7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를 끝내신 후,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간다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의 근심하는 마음을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로하시면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이 거처는 영의 몸(부활)을 말한다. 거듭난 자가 입는 그리스도의 옷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지난 3년 동안 함께 동고동락 하시며 많은 것들을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셨기에,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제자들이 알고 있다고 하신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 의심이 많았던 도마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그 목적지도 모르는데 하물며 가시는 그 길을 어찌 알수있느냐고 대답을 했다.

도마의 이러한 대답에 주님께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오직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은 십자가 외에는 없다는 말이다. 십자가와 연합되는 자가 생명의 부활을 얻게되어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씀이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성도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현재적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로 연합되므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빌립 앞에 계신 것"은 그 분이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으므로, 곧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과 예수님과 빌립을 포함한 제자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이다.

빌립보서 2 6절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말씀하기에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도 하며 더 큰 일도 한다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믿는 자들을 통해서 일하신다. 그래서 제자들을 통해서 부활생명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분

 

1. 아들의 권한

요한복음 522-29절『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하나님이 아들에게 주신 권한은 심판하는 권한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들을 믿는 자는 사망에서 부활생명으로 옮기는 권한"도 아들에게 주셨다.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현재적으로 부활하였음을 믿는 자에게는 사망에서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는데,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십자가와 연합되는 자에게 하나님(그리스도)이 모든 죄를 사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신도들은 과거의 죄만 용서받았지, 현재와 미래는 계속 회개하고 예수의 피를 통해서 용서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부활도 육체가 죽은 후에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런 신도들은 여전히 육의 눈으로 보는 유대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 6 28-29절에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관여하시지 않지만, 하나님은 구원의 일에 대해서는, 창세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일을 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씨의 약속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과 영생으로 부활하심을 믿게 하는 일이다.

초막절의 중간쯤 되자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권위와 정체성에 대해 비아냥 거리고 불신하는 유대인들에게 역공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요한복음 5 18절에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들과의 갈등의 골이 깊어진 이유가 바로 안식일에 병든자를 고친 것과 동시에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동등하게 여겨 신성모독을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과 사역에 놀람과 동시에 편견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이 비아냥적인 태도로 질문을 던진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예수님은 응답하셨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예수님은 본인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능함을 들어내려 하지 않았다.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드러내셨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5장 이후 점진적으로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깊은 골이 깊어가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든 자들을 고치셨고, 이로 인해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을 보내신 이가 하나님 이라며 자신을 소개 했다. 신성모독죄까지 가중된 것이다. 안식일도 지키지 않고, 신성모독까지 하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처벌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향해『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유대인들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행한다. 8째 날이 평일이든 안식일이든 상관없었다. 안식일을 어기면서 까지도 남자아이의 작은 부분을 칼로 도려낸다. 이를 통해 구별된 선민인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임을 선포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지는 안식일에도 태어난 지 8번째 날이 되면 유대 남자아이들은 몸의 작은 부분을 칼로 도려내고 구원받은 백성으로 선포하며 함께 기뻐하면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을 아파 누워 있던 이가 치유 받고 자리를 들고 걸어갔는데 함께 기뻐해 주지 못하느냐 라는 것이다. 도리어 안식일에 치유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범법자로 몰아 죽이려 하느냐며 도리어 꾸짖으신 것이다. 그리고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셨다.  

인류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달았던 시기는 단 한 번도 없거나, 알아도 극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께서 자신 스스로를 감추셨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마다 자신을 모든 인류에게 나타내셨다. 신명기7 9 절에서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저지른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대인을 비롯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당시의 상황도 예수님과 예수님 주변의 많은 무리 사이에 깊은 간격이 있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또한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예수님의 출신과 성장배경을 이야기하며 그리스도일리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유대 지도자들"을 보며, 그들은 공권력으로 예수를 잡아들이지 않는 당국에 의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수님이 물리적으로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과 깊이 있는 만남까지는 가지 못했다.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피상적인 그들의 앎은 예수님에 대한 본질적인 앎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침묵하고 오인하는 종교지도자들과 무리들 앞에서, 예수님의 태도는 창조 때로부터 같은 맥락으로 가르치시며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며,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시면서, 더 중요한 본질로, 종교지도자들과 무리들을 이끌어주심을 보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의 영적 무지를 꼬집는 말씀이다. 만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참되시며 바른 계시를 주시는 분으로 알았다면, 자신을 모를리 없다는 말씀을 하신다.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음에도,  선민임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신도들도 예수를 잘 알지 못한다. 어떤 이는 예수라는 이름을 이용하여 장사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세상에 온 예수를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신으로 모시는 것이다. 마치 삼신사상과 같은 모습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갔다. 성도의 심령 속으로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들어가 성도에게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신도가 이를 믿지 않으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재림하여 백보좌 심판을 하실 것이다.

 

2. 왕의 아들의 신하를 살리시다

요한복음 4 46-48절『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예수님 일행이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는 여정 중에 생긴 일로 요한복음이 전하는 일곱개의 표적 중에서 두 번째 표적으로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쳐주신 이야기다.

갈릴리에 이르자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번째 이적의 소식은 갈릴리 지역에 사람들의 입에 입을 타고 전해졌을 것이다. 목격하지 않고는 믿지 못할 이 소식에 사람들은 의심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유월절 행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예루살렘 성전에서 한 청년이 서슬이 퍼렇게 성전 앞에 즐비하게 있었던 장사꾼들을 나무라며 상을 엎어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유월절 행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제물을 구입할 때마다 폭리를 취하는 이들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한 청년의 이 용기 있는 행동에 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바로 그 청년이 가나 혼인잔치의 이적을 행한 예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 했을 것이고, 이후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머물면서 말씀을 전하는 집회에 참석했다. 그 청년 예수가 갈릴리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갈릴리 사람들은 나와서 예수님을 환대했다. 환대를 받은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나에 도착했다.

가나에서 약30km 떨어진 가버나움에 거주하고 있는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에 걸렸다.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다녀보았지만 아들의 병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그러던 중 가나에서 예수라는 사람이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리고 예수가 자기가 살고 있는 가버나움을 다녀갔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때만 해도 그런가보다 하고 지냈는데, 유월절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에서 전해오는 소식은 그로 하여금 한 가닥 희망을 갖게 했다.

예수님이 가나에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종들을 시키지 않고 자신이 가나로 달려갔다. 한 걸음에 가나에 도착한 그는 예수님을 찾아가서, 예수님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수님의 대답은 냉담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이 말을 들은 왕의 신하는 처음에 머뭇거렸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주여 라는 호칭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방을 올리는 존칭이다.

당시 최고위층의 신분인 왕의 신하가 일개 시골 청년에게 선생님, 『내 아이가 죽어가고 있느니 제발 내려와서 고쳐주십시오』라고 하며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그에게『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하셨다.『살아있다』로 해석된 헬라어『짜오』는 병든 자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예수님의 대답에 왕의 신하는 더 이상 조르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기로 했다. 서둘러 집을 향해 내려갔다. 그 때 자기 집에 있어야 할 종들이 허겁지겁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허겁지겁 달려오던 종들은 주인을 만나자 숨을 헐떡이며『주인님, 주인님 아들이 살아났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해들은 왕의 신하는 하인들에게 물었다. 『내 아들이 언제부터 낮기 시작했느냐?』종들이 대답하되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왕의 신하는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있다고 한 그 때와 일치함을 깨달았다. 이후 왕의 신하는 물론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고 증거한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주춧돌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가버나움에 내려와서 아들을 살려달라는 아버지의 간청에 예수님은 왕의 신하와 함께 내려가서 직접 그의 눈앞에서 아들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 거리가 너무 멀거나 내려가기 귀찮아서가 아니라, 왕의 신하에게 확실한 믿음을 심어주시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그들이 눈앞에서 펼쳐진 그 이적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이 믿음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다. 보이는 것에만 의지한 믿음은 그 뿌리가 흔들리기 쉽다고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왕의 신하의 간청에도 불구하고『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왕의 신하와 함께 내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네 아들이 나앗다』는 말씀을 하심으로 그의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주셨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을 때, 30km 떨어진 가버나움 집에서 죽어가던 아들이 살아나는 이적이 펼쳐졌다. 결과적으로 그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을 목격했지만, 그 이적은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결과로 파생된 것이었다. 즉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아들을 살려낸 것을 목격하고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자체를 믿었을 때 자신의 아들이 살아나는 이적을 경험했고, 이를 통해 그와 그 온 집안은 믿었다.

왕의 신하는 왕의 신하의 신분이 아니라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신분으로 자신의 사회적 신분에 비하면 하찮기 그지없는 청년 예수에게 매달렸다. 인간의 자식을 향한 사랑이 이러할 진데, 어찌 성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성도의 간구와 기도를 외면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부활생명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부활생명을 주시겠다고 하는데도, 교회 사람들은 육적 부활을 생각하고 있으며,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육체가 죽은 후에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하늘의 생명인 부활생명을 주려고 해도, 육의 눈으로 생각하므로, 그들은 부활생명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3. 병든 자를 치유

요한복음 5 1-9절『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명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라 하는 못가에 가셨다.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이 말은 당시 미신이 얼마나 심각하지를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상황이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과거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한 유대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38년된 병자는 신명기 2 14절에서『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의 기간을 말한다. 38년된 병자가 바로 가나안 입구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린 이스라엘을 나타낸다. 모든 군인은 38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가데스 바네아 까지의 걸린 기간이 약 2년이었으므로,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를 40년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에게『38년된 병자』라는 것을 알려주신다. 이스라엘이 시내산 앞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것처럼, 우상과 미신을 믿고 있는 것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이『네가 낫고자 하느냐』에서『낫다』라는 말은 히브리어『하야』이라는 말로『살아있는』이라는 말이다. 그래서『너 부활생명으로 살기를 원하느냐』라는 말이다. 그 말은 『너는 죽은 자』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병자가 살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고,『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이스라엘은 그들을 살려주기 위해 오신 메시야를 알지 못하고, 미신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그들의 미신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를 믿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네 자리(38년 동안 앉아 있었던)는 이스라엘을 나타낸다. 아모스 312절에서『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도 건져냄을 입으리라』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열국으로 흩어질 것을 말하고, 장차 그리스도로 인해서 다시 회복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네 자리』의 침상은 바로 "아모스 선지자가 표현한 이스라엘"이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환란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말해주신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스라엘이 멸망되어 흩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38년 병자가 안식일에 고침을 받았다.

안식은 쉬는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부활생명)을 말한다. 38년 된 병자에게도 안식을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안식(부활생명)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다 주시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의 주인이시다. 예수님과 연합되지 않는 자는 부활생명을 얻지 못한다.

마가복음 1 15절에서『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으라 하시더라』때가 무엇인가? 바로 안식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져서,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자에게 안식(부활)을 주시는 것이다. 38년된 병자는 이스라엘을 나타내지만,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라고 말하므로 38년된 병자가『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그런데, 병자가 병을 고침을 받았지만, 여전히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안식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일 후에 그 병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38년된 병자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만났다. 예수님이 바로 성전(부활생명)을 나타내신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자는 모두 부활 생명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4. 오병이어의 기적

요한복음61-13절『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말씀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나오는 오병은 다섯개의 떡인데, 떡은 헬라어로 알토스, 히브리어로는 네헴(: 진설병)이라 한다. 하나님이 계신 법궤 앞에 금으로 만든 상이 있는데, 그 위에 진설병이 놓인다. 진설병은 떡이다. 진설병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출애굽기 25 30절에는『상 위에 진설병을 두고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진설병 12개를 놓는데, 이스라엘을 상징하기도 한다. 떡 다섯개는 모세오경을 말한다. 즉 율법을 말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개는 모세오경(율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완전히 부활생명이 되지 못한 떡이다.

물고기는 헬라어로 익스투스라 하며,『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원』이라는 말씀을 포함한다. 물고기는 요나의 표적을 나타낸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삼일만에 부활하심을 나타낸다. 물고기가 두 마리 있다는 말은 첫사람 아담(십자가의 죽음)과 마지막 사람 아담(부활)을 의미한다. 떡 다섯을 먹고 남은 열두 광주리가 남았는데,『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말은 이스라엘(12지파)이 말씀을 들었지만 진리(부활생명)를 모른다는 말이다. 열두지파에서 열둘은 이스라엘의 지파를 상징하지만,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상징한다. 세상 사람들이 현재적 부활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두 광주리에 있는 생명의 떡(부활)을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5. 날때부터 맹인된 자를 고치시다

요한복음 9 1-3절『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 질문에서 날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은 죄때문인가? 라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다. 여기서 죄라는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육의 죄성인가 아니면 자기의 죄인가라는 것이다. 자기의 죄는 이 세상에 태어난 자가 자기의 죄를 안고 태어난다.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지은 원죄를 말한다. 악한 천사들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범죄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범죄한 영들을 육체 속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육체 속에 가두어진 영들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버려 죽은 것이다. 그래서 혼적인 상태로 태어났다. 영이 죽었으므로 혼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맹인이 된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이『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요한복음 6 29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여기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에 대해서 요한복음 6 39-40절에서 설명하고 있다.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맹인이라는 말의 뜻을 깨달아야만 한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문자적으로 표현된 것 이면에 하나님이 감추신 의도가 있음을 발견해야만 한다. 율법은 표면적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의인되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면적으로는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인간들은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신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부활생명을 얻는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6 48-51절에서『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율법을 상징하는 맛나를 먹었어도 죽는다는 말이다. 광야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살리는 법이 아니라, 죄인들을 징계하는 법이다. 오직 성령의 법이 죽었던 영을 살리는 것이며, 이것이 부활생명으로 이어지는 성령세례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세상의 이야기를 세상의 이야기로 생각하면, 하늘의일을 알 수 없다. 성경은 하늘의 일을 세상의 일로 비유해서 설명해놓고 있다. 그래서 비유를 통해서 땅의 일을 통해서 하늘의 일을 깨닫지 못하면, 모두가 성경에 대해서 맹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니고데모라는 랍비와 대화할 때『내가 땅의 일에 대해서 말을 해도 믿지 않는데, 하늘의 일을 말한다고 믿겠는가』라고 말씀한 적이 있다.

맹인이 눈을 뜬다는 것은 하늘의 일에 대해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마태복음 13 34-35절에서『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맹인이 눈을 뜨는 것에 대해서 이사야 35 5절에서『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라고 말했다. 마태복음 11 5, 누가복음 4 18절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맹인이 눈을 뜨게 되면, 죄와 사망의 원인을 알게되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길도 알게되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는 것이고, 부활과 연합되는 것이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라는 것을 알게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회개하여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회개하는 자에게 부활의 영원한 몸을 주어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9 6-7절에서『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그런데 소경의 눈을 뜨게 한 날이 안식일이었다. 안식은 매여있는 상태에서 놓여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사탄으로부터 놓여지며, 안식에 들어가는 자이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매여있는 자에게 안식을 준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므로, 안식하지 못하는 자에게 안식일에 안식을 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근거로『왜 안식일에 일을 하느냐』라고 예수님께 따지듯이 질문했다. 안식일의 의미도 모른채 질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갇혀있는 자를 풀어주시는데,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소경들인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 16-24절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소경이라고 표현하셨다. 율법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말하는 바리새인들을『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말씀하셨다. 오늘날도 율법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만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소경인 것이다. 율법의 규정에 매여있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소경들이다. 소경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마가복음 8 22-26절에도 유사한 내용이 등장한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뒤플론)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옴마타)에 침을 뱉으시며(프튀사스)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맹인으로 번역된 뒤플론(τυφλν)은 투포우 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는데, 교만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디모데전서 36절에서『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교만한 자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자를 의미한다.

옴마타(μματα)는 눈으로 번역되었지만, 어원은 옾타노마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느 것을 향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는 자는 율법으로 눈이 향하게 되어있다. 율법을 지켜 의를 행하는 자가 바라보는 것은 율법의 규율인 것이다.

프튀사스(πτσας) 는 침을 뱉다 라고 번역했는데, 두루마리를 접다 라는 의미가 있다. 누가복음 420절에서『책을 덮어(프튀사스)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두루마리(성경)을 접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접어놓는 것이다.

 

6.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다

요한복음 11 17-26절『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이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육체였다. 이 육체는 다시 살아더라도 반드시 죽게 되어있다. 이는 부활과 다른 개념이다. 부활은 이전의 것을 다시 하는 개념이다. 예수님의 이전의 것은 하늘 생명이다. 예수님은 잠시 육체 속에 들어와 사람이 되었지만, 육체를 벗고 난 뒤에는 다시 하늘 생명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게 부활이라는 말이다. 영적인 부활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도 역시 죽었던 육체 속에 갇힌 영을 살리는 것이 바로 부활이라는 말이다. 요한복음 6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마르다가 말하기를『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하면 무엇이든지 다 주실 것을 믿는다』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이『다시 살리라』라고 했는데, 마르다는『다시 사는 것』을 현재적이 아닌, 육이 죽은 후 미래의 마지막 날 부활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현재적이다. 죄에 대해서도, 『언젠가 내 죄가 사하심을 받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과거, 현재, 미래의 죄 사하심이다. 모든 죄를 사하심이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나는 항상 부활이요 생명이야, 나를 믿는 자는 영이 죽었었지만 살아나고, 영이 살아나면 하늘로 부터 오는 믿음의 선물을 받아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을 육의 관점에서 보면『나를 믿는 자는 육이 죽지만 언젠가 살아나고, 육이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문장의 구조가 대단히 어색하다. 성경의 말씀은 영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거짓선지자들이 육의 방향으로 돌리고 있다.

 

7. 바다 위를 걷다

요한복음614-21절『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어두움은 여전히 제자들이 율법이라는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나타내신다. 바람이 불어 파도를 일으키는 것은 율법을 벗어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될 것을 나타내신다. 마태복음 14 22-36절에서도 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질렀다. 베드로는 배를 나가 물 위로 걸었다. 배는 바로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배의 시작은 노아의 방주다. 방주는 구원의 표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여기에서 바다는 바로 율법을 나타낸다. 그래서 물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은 율법 위에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은 마침내 놀라운 표적을 경험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명기 18장에서 예고된 모세와 같은 예언자라 믿고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정치적인 해방을 일으키고, 경제적으로 부흥시키며, 사회 정의를 구현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꿈을 성취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고, 자신들의 기도의 응답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셨다.

파도를 다스리시고,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그들의 요구를 뿌리친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선물로 주고, 배부르게 하고, 해방을 주시기가 싫어서도 아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그들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수많은 표적을 보던 유대인들은 예수님 자신보다도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능력을 더 원했을 뿐이다. 그분을 왕 삼으면 살림살이가 더 나아질 것이라 믿었고, 고통과 고난도 사라질 것이라 믿었고, 그 어떤 병도 다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이 아니다. 이런 믿음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부와 번영을 확장시키고, 풍족한 생활을 보장받으려는 이교도들의 우상숭배적 태도와 하등 다를 바 없는 맹신에 불과할 뿐이다. 오늘날 기복신앙이 대표적인 유형이다.

 

. 율법을 완성하는 분

 

1. 세례요한의 증언

요한복음 1 19-27절『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세례 요한은 마태복음 3 6절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왔다고 증거할 정도로 세례 요한은 인정받고 있었고, 명성도 드높았으며,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는 때였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그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증언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 부르심을 따라 살았다. 사람들이 혹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내실 그리스도이신지를 궁금해 하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세례요한에게 보내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네가 누구냐』 하고 묻는다.『당신이 구약에서 말한 그 오실 분, 곧 그리스도이십니까?』 라고 질문한 것이다. 요한이 그 질문에 분명하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또 물었다. 당신은 엘리야입니까? 아니면 그 선지자입니까? 요한은 분명하게 두 질문에 다 아니라고 대답했다. 답답해진 그들이 묻는다. 그러면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그러자 세례 요한은 대답했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주의 길을 준비하도록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한 자신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는 앞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역할이 자신이 해야 할 일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빛이 아니요 그 빛에 대해 증거하는 자며, 자신이 주목을 받을 자가 아니라 그 주목을 하나님의 아들께 드리기 위해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았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회개를 외치는 것이다. 천국(예수 그리스도)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것이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와 참된 회개를 선포하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그를 그리스도로 오해하기도 하였다. 그의 광야에서의 검소하고 청렴한 삶의 모습과, 기득권을 내려놓은 생활은, 당시의 호화롭고 사치하며, 물질을 사랑하던 종교지도자들과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진실된 회개, 참된 돌이킴을 요청하며, 말로만 그렇게 하나 삶의 모습은 그에서 먼 자들을 향해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기를 촉구하였으며, 나아가 당시의 권력자 헤롯 안디바의 부도덕하고 부패한 모습을 엄히 책망하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빛과 빛을 증거하는 자, 구약에서 말씀하신 오실 분과 그 길을 예비하는 자를 헷갈려 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게 몰려와 그를 따르려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오해를 깨뜨리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증언하는 동시에 자신의 작음과 약함과 자격 없음을 고백하였다. 당시에 가장 하찮고 낮은 종이 행했던 일인 신발 끈을 푸는 일 조차 자신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의 뒤에 오실 분이 크신 분이심을 증언하였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나아오시자 세례 요한은 고백했다.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리고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보내심을 받았으나, 자신보다 먼저 존재하신,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심을 알았다. 요한은『내 뒤에 오시지만 나보다 앞선 분이 바로 이분이시며 예수님께서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심』을 고백한 것이다.

그리고 또 증언한다.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죄의 문제)를 베풀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내게 성령이 내려 머무는 사람을 보면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부활) 베푸는 이인 줄로 알라 하셨고, 그리고 내가 보니 성령이 예수님 위에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머물렀다고 고백한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라고 증언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십자가의 죽음), 성령이 그 위에 머무시는 분,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 베푸시는 분(부활의 첫매) 예수님을 증언하며 마침내 세례 요한은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했다.

그는 메시아의 길을 예비했고, 아무도 그분을 모를 때에 그 분의 길을 준비했다. 아무도 메시아가 그렇게 오실 것을 원치 않던 때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을 염원하며 그렇게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였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의지하며 집중하도록 하지 않고, 구약이 예언한 오실 분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리스도께 집중하며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따르도록 하였다. 누가 주인공인지,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렇게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오직 예수님께서 드러나시기를 소망하고 자신은 숨겨지기를 원하며 살아간 사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자신은 광야의 소리임을 인식하고 증언하며 살아간 그의 삶을 하나님은 받으시고, 그리스도의 길을 여시며, 말씀을 이루어 주셨다.

2. 가나 혼인잔치

요한복음 2 1-11절『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많은 교회사람들은 예수님의 첫 표적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신 것으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그리고 하인들의 순종 등등 이런 이야기를 이야기한다.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은 예수님의 처음 표적이었다. 성경에는 혼인잔치에 대해서 세군데 나온다. 가나의 혼인잔치, 마태복음 22장에서 나오는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해 베푼 혼인잔치,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이다. 세 혼인잔치는 모두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설명하기 위한 모형이다. 혼인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혼인잔치가 끝나기 전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은 혼인잔치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혼인잔치는 온전한 혼인잔치가 아니라는 말이다. 완전한 혼인잔치가 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를 설명한다.

혼인잔치의 연회장에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물항아리가 여섯개가 있었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항상 외출하고 오면 사막지대라서 물로 씻어야 했다. 이것은 장로들의 유전으로 지키던 것이었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포도주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물과 포도주의 차이가 있다. 예수님이 물항아리 여섯개에 물을 가득채울 것을 말씀하셨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즉 구약의 율법을 말한다. 아직 복음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율법이 가득차게 되면 이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된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5 39-40절에서 영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으며, 이 성경(율법)이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하는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영생은 부활생명을 의미한다.

물항아리는 여섯개인데,『물이 항아리 입구까지 찼다』는 것은『율법을 온전히 지키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고 하다보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다가 스스로 죄인임을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하는데, 발견하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율법을 잘지켜서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말은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 라는 말이다. 물은 구약의 율법이지만 포도주는 새언약의 피를 상징한다. 누가복음 22 20절에서『저녁먹은 후에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마지막 유월절에 예수님은『새언약인 피』라고 하셨다. 새언약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의 비밀이 있고,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놀라운 하나님의 새언약이다. 율법으로는 완전한 혼인잔치가 될 수 없지만, 새언약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잔치는 온전한 혼인잔치가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언약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새언약은 로마서 6 3절에서 처럼 죄인이 회개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되는 것이다. 그러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다.

『여자여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나이다』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혼인잔치를 말하고 있다. 완전한 혼인잔치가 아닌데, (율법)이 가득차므로 죄를 깨닫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상징인 포도주(새언약: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온전한 혼인잔치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거룩한 마음으로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율법에 의해 죽으셨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되는 자도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인 것이다.

갈라디아서 3 22-23절에서『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자신이 율법의 그물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미련한 다섯처녀가 되는 것이다.

미련한 다섯처녀는 신랑이 온다는 소식에 잠을 깨니, 기름이 없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게『기름을 꾸어달라』고 하니『기름이 모자란다』고 주지않고,『파는 사람에게 가서 사라』라고 했다. 그래서 사러 갔다 와보니 문이 닫힌 것이다. 미련한 다섯처녀가 문을 열어달라고 하니, 예수님이『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미련한 다섯처녀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예수님이 모른다』라는 것이다. 미련한 다섯처녀는 예수님을 알고 있는데, 예수님이 미련한 다섯처녀를 모르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내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께 희생제물과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은『받은 적이 없다』라고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책망하셨다. 마태복음1032-33절에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그런데, 미련한 다섯처녀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했다. 그런데『예수님은 모른다』고 했다. 다섯처녀가 단지 우기는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이유는『자기를 기다리는 자들을 데려가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데려갈 사람을 알고 있다. 미련한 다섯처녀는 데려갈 사람이 아닌 것이다. 미련한 다섯처녀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는 초점이 맞지 않다. 슬기로운 다섯처녀는 현재적 부활을 믿는데, 미련한 다섯처녀는 육체가 죽은 후에 부활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의 생명이 없는 것이다.

 

. 부활생명을 주시는 분

 

1. 하늘로부터 오는 이

요한복음 331-36절『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타 레마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분은 예수님이고, 땅에서 난 자는 세례요한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그는 예수님이시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증언을 받는 자가 없다는 말이다. 성부 하나님이 그 증언을 받는 자를 참되다 라고 도장을 찍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예수님이다. 타 레마타는 그 말씀들이다. 타 레마타 ῥήματα)는 하나님이 하신 그 말씀들이다. 예수님 자신이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말을 듣고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연결된다. 이때 성령을 받는 것은 성령 충만을 의미한다.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아들은 창세 전에 계획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세상에 있는 영을 살리기 위해 세우신 그리스도이시므로, 모든 계획이 그의 사역으로 결정된다. 하나님은 아들인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권한을 다 주는 것이며, 죄를 사해주는 권세와 심판의 권세까지 다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잘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 사역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아가페라는 사랑으로 설명된다.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이 되어 죽었던 영을 살리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대체되는 것이다. 이것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아들의 잘못을 아버지인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사랑인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일반적으로 예수를 믿는다 라고 했을 때, 예수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죽은 후에 부활시켜 준다는 것을 믿는다 라는 의미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아들을 믿는다 라는 것은 현재적인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인 부활이다. 이천년 전에 죽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그와 더불어서 내가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용서받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천년 전에 부활하신 분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부활과 연합하여, 지금 현재 내 속의 죽었던 영이 살아나서 이전의 하늘의 생명을 가졌던 것처럼 다시 그 영원한 하늘의 생명으로 돌아감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한 천사가 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천사)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적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과거의 죄만 용서받았고, 그래서 날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의 피로 다시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고 믿는 자들, 그리고 육체가 죽어서 그 육체가 다시 부활한다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1125-26절『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는데, 예수님이 마르다의 집에 있었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르다가 말했다. 11 22절에서 마르다가 말하기를『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하면 무엇이든지 다 주실 것을 믿는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예수님이『다시 살리라』라고 했는데, 마르다는『다시 사는 것』을 현재적이 아닌, 육이 죽은 후 미래 마지막 날 부활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11 23-26절에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은『나는 항상 부활이요 생명이야, 나를 믿는 자는 영이 죽었었지만 살아나고, 영이 살아나면 하늘로 부터 오는 믿음의 선물을 받아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을 육의 관점에서 보면『나를 믿는 자는 육이 죽지만 언젠가 살아나고, 육이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성경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 믿음이 중요하다. 주님이『지금 무엇을 말씀하시는가』가 중요하다. 요한복음 5 24-25절에서『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이 말씀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현재적인 부활의 말씀이다.『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지금 들을 때 죽었던 영이 살아난다』는 말이다.

미래 심판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듣고 깨어나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듣는 자()가 지금 살아나는 것이 구원이다. 현재 하나님 아들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영이 살아난다는 말이다. 5 26절에서『생명을 주신다』고 하셨다. 이것이 일어나지 않으면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고, 교회생활 열심히 해도『영이 살아나지 않으면』구원받지 못한다. 이것은 회개하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에게 주님이 믿음의 선물을 주시는 것이다. 이 믿음은『지금 영이 살아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영이 살아난다. 성경을 아무리 암송을 잘 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영이 살아나지 못한다. 히브리서 4 12-13절에서『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요한복음 6 53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하니 60절에서『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사람들이 수군거리니 예수님이 다시 63절에서『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27 52-53절에서『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 음부에 있던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타난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심판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한복음 5 24-25절의 말씀은 현재적 부활의 말씀이고, 마르다가 말한 것은 바로 5 28-29절에서 말하는 미래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5 24-25절의 말씀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영이 살아나지 않으면 생명의 말씀이 되지 않는다. 오직 회개하는 자만 영이 살아난다. 주님은 현재적 부활이시다. 지금 이 순간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실 것이다. 회개는 죄를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요, 죄로 가득한『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게 부활생명으로 거듭남이다. 즉 거듭남이 현재적 부활인 것이다. 거듭난 자는 비록 육체가 있지만 예수님의 부활과 같은 신령한 몸(영의 몸)으로 부활한 것을 믿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첫째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은 결국 둘째 사망에서 부활(둘째 부활)하게 된다. 둘째 사망에서 둘째 부활을 당하지 않으려면 신도는 현재적 부활을 믿어야만 한다. 곧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첫째 사망)되어야만, 첫째 부활(현재적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3. 생명의 떡

요한복음 632-35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주린 배를 채운 백성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면 백성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수소문하여 가버나움까지 배를 타고 뒤쫒아 왔다. 이들에게는 먹는 것이 심각하고 현실적인 문제여서 조심스럽게 예수님께 접근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현실적인 문제와 속마음의 의도를 다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많은 이적을 베푸셨다.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병든 자를 낫게 하시며, 귀신을 내어 쫓았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주린 사람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광주리를 남기셨다. 또 풍랑과 바람을 잔잔케 하시며 물위를 걸으셨다.

예수님은 그들이 처한 형편과 상황을 불쌍히 여기셨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하셨다. 고통 속에 매여 있는 그들을 낫게 하고 자유롭게 해 주시고자 하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기적을 베푸셨다. 그러나 이런 기적을 보면서 마치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처럼, 이런 현실의 문제에 계속 매여서 영생하는 하늘의 양식을 찾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세상에 속한 썩어져 없어질 것들을 찾다가 주님을 놓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베푸신 궁극적인 이유는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죄 가운데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알지 못하고 두려움과 염려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부활생명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오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이 표적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찾아 온 것임을 아셨다. 그들은 또 다시 표적과 기적을 바라고 한번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육신의 양식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찾아왔다. 예수님은 양식의 문제를 무시하지 않으신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들의 육의 양식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무리 기적을 체험한다고 해도 그들이 땅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얻고자 한다면 결코 주님이 메시야요, 하나님이 보내신 자요 영생을 주시는 자시라는 것을 알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위해 썩을 양식을 구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말씀하신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이 말씀에 무리들은 예수님께 다시 되묻는다.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인지 묻는다. 이들의 질문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 외에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몰랐다. 백성들이 질문한 하나님의 일은 원문에서는 복수로 표현되었다.『어떤 일들을 해야 영생을 얻는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떤 많은 일들이 필요합니까?』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썩어져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부활영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일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말했다. 믿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하늘의 부활생명을 주는 자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내신 분으로,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죽었던 영을 죄에서 건지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분임을 믿는 것이다. 믿는 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가 나에게 어떤 분인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백성들은 다시 질문을 했다.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어떤 표적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모세는 40년간을 만나를 내리도록 해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였는데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이라면 얼마나 더 큰 표적을 볼 수 있겠느냐?”라는 것이다. 이들은 만나의 기적 또한 육신의 양식이 해결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어, 그들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다. 세상의 문제에 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표적을 구하는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며 영원히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는 영의 양식이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주신 참 만나인 부활생명의 떡이므로 자신을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말씀하신다. 누구나 육체는 썩어 땅에 묻힌다. 그러나 영은 구원을 얻어 영생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믿어 부활영생하라는 것이다. 믿는 것이 영생을 얻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들을 믿는 것은 예수와 함께 죽고 현재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4. 니고데모와의 대화

요한복음 3 1-13절『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당시에 높은 위치의 랍비였으며, 예수는 30대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가 밤에 몰래 예수를 찾아와『랍비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에게로 부터 왔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랍비로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는 니고데모에게『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육체의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에게로부터 태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육체가 죽어서, 환생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비록 육체가 살아있지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다. 그래서 오늘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마음의 상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마음이 아니라,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육의 몸이 아니라 영의 몸이 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 44절에서『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영의 몸은 혈통으로 난 것이 아니다.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지 않으나, 영의 몸이 있는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데, 물은 육의 몸이 죽었음을 의미한다. 노아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물에 빠져 죽었을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죽은 자라는 것을 믿고, 성령의 능력으로 영의 몸이 태어나는 것이다.세례는 죽음을 상징한다. 어린양을 잡아 희생제사를 드릴 때, 피를 뿌리고(물세례), 살을 태운다(불세례). 피를 뿌리는 것은 죄사함의 의미가 있으며, 살을 태우는 것은 옷을 태우는 의미가 있다. 창세기 321절에서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나가게 하신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신다.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은 레위기 16절에서『그는 또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것이요』 라고 되어있는데, 이와 연계되어 있다. 가죽옷을 히브리어로 가죽(오르)의 옷(코트노트)이다. 개역개정에서 『가죽』이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영어성경의 skin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된 것 같다. 그러나 skin은 살도 된다. 즉 가죽이라는 『오르』는 레위기 16절의 살 덩어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옷은 번제물의 가죽에 해당된다. 옷은 혼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입었던 혼을 태우고 새혼(그리스도의 옷:영의 몸)을 입는 것이다.

새로 다시 태어난 영의 몸(부활)은 성령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요한1 3 9절과 5 1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탄이 접근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난 부활생명을 가진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5.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요한복음 49-14절『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사마리아 여인조차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과의 벽이 있음을 말해준다.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메시아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연인이 간절히 바라던 메시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휘도르 존)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에데이스)』이 부분은 네가 메시야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만일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메시야라는 것을 알았다면 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에데이스(δεις)는 지금 당장 확인해서 알았다는 말이다. 휘도르 존(δωρ ζν)은 살아있는 물이라는 의미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수는 하늘의 부활생명을 의미한다.

사마리아 여인이 말하는 생수는 우물로부터 얻을 생수를 의미한다. 예수님과 영적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 물은 율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야곱은 그 이름이 이스라엘이다. 솔로몬의 아들 때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갈라졌을 때, 북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므로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야곱의 우물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사마리아 연인이 예수님께 당신은 물길을 통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야곱보다 신통한 능력이 있는가 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는 물은 단순히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다시 샘물이 되어 계속 솟아오르는 물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마실 수 있게 하는 영생의 물이 된다. 여인이 생각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비상식적인 말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대꾸한다. 당신이 기적이라도 베풀어서 그런 물을 한번 만들어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420절에서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묻는데,『우리 사마리아 인들은 이 산(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던데, 어떤 것이 맞는냐』라고 물었다. 예수님은『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오나니』라고 했다.

보통 교회사람들은 예배를 드리러 성전에 간다고 생각한다. 성전에 가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찬양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이 산에도 하나님이 없고, 예루살렘에도 하나님이 없는 것이다.『너희 안에 하나님이 계셔서 너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라는 것이다. 너희 안에 하나님이 없으면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가야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즉 『너희가 성전이 된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는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자는 현재적으로 부활하여 성도의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지고, 그리스도가 성도의 심령 속으로 재림해 들어가 하나님 나라를 부어주신다. 갈라디아서 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땅에 있을지라도 한 사람, 한 사람 다 성전이 되어서 스스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되, 신령(성령)과 진정(진리: 말씀이신 그리스도)으로 예배를 드리면 참 예배가 되는 것이다.『신령과 진정으로』라는 말은 『마음을 정갈하게 하여』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말씀이 밝히 드러나서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그것이 예배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가르침으로 깨닫게 해 주시면 그 깨달아진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2. 예수님 가족과 제자들의 영적 상태와 성전 청소

 

. 예수님의 가족과 제자들의 영적 상태

 

1.육신의 형제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다.

요한복음 7 4-5절『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에 대해 냉담해하던 갈릴리 사람들의 반응을 보았고, 또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행하실 때에, 변화된 갈릴리 사람들의 반응을 보았다. 만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초막절 예루살렘에서 갈릴리에서와 같은 기적을 행하게 된다면, 상당한 명성과 함께 세력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예수님의 형제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형제인 예수님이 명성과 세력을 얻게 되면, 자신들에게도 상당한 유익이 찾아올 것은 당연지사일거라 이미 머릿속에 계산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며, 예수님의 기적을 가까이에서 보고 들은 형제들이었지만, 이런 간청은 믿음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형제들은 자신들에게 유익을 줄 정치적인 메시야가 필요했던 것이고,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요청을 따라준다면, 예루살렘은 좋은 기회의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불신앙적인 동기가 그들에게 있었다. 이에 예수님은『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시며, 갈릴리에 그냥 머물러 계셨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때와 형제들이 생각하는 때는 다른 것이다. 형제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면 관중 들 앞에서 나타내 보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때는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명절(초막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사하심을 받는 때가 되지만, 예수님은 죄를 사해줄 수 있는 십자가의 때이다. 그런데 이 때가 아직 멀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형제들에게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는다고 말하고, 갈릴리에 머물다가 은밀히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형제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명절인 초막절이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임을 알기에 조용히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2. 두 제자

성경에는 두 제자에 대한 이야기가 세군데 등장한다. 처음에는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를 따르는 장면이다.

요한복음 137-39절『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에콜뤼데산 토 예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데아사메노스)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제테이테)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푸 메네이스)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에르케스데) 보라(카이 옾세스데)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에 대해서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두제자는 예수에게로 가서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야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예수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하루를 지내며 확인한다.

에콜뤼데산 토 예수(ἠκολούθησαν τῷ Ἰησοῦ)에서 토는 여격이다. 그래서 토 예수는 단순히 그 예수를 따라갔다는 그 의미가 아니라 예수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 예수를 따라갔다는 것이다. 즉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따라갔다는 말이다. 왜 따라갔는가에 대해서는 두 제자가 그의 말을 순간 들었고 깨달음이 왔다는 것이다. 데아사메노스(θεασάμενος)는 근접하여 보시고 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두 사람을 가까이에서 찬찬히 자세하게 바라보았다는 말이다.

제테이테(ζητεῖτε)는 추구하다라는 의미다. 어떤 비전이 함축되어 있다. 무슨 목적으로 나를 따라 오려고 하는가 라는 의미다. 푸 메네이스(ποῦ μένεις)는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다. 에르케스데 카이 옾세스데(ἔρχεσθε καὶ ὄψεσθε)는『너희 자신을 오게하라 그러면 보게 할 것이다.』예수님께 나아가고 보는 모든 것이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열시는 오늘날 오후 네시 경에 해당된다. 예수님이 묵고 있었던 집에서 하루를 같이 보내고 오후까지 있었던 것이다. 하루 동안 묵으면서 예수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두번째 두 제자는 요한과 베드였다. 요한복음 140-42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프로톤)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프로톤(πρῶτον)은 시간적 개념의 먼저가 아니라, 앞서 있는 자를 의미한다. 즉 먼저인 요한이 시몬을 찾았다는 것이다. 안드레가 베드로의 형임을 알 수 있다. 시몬 베드로는 메시야를 찾기 위해 노력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몬이 베드로가 되는 순간이다. 그가 메시야를 찾다가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을 말해준다. 오늘날도 그리스도를 찾는 자가 예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예수가 누구인지 정말 간절히 그리스도를 찾는 자에게 하나님이 그를 만나주신다는 것이다.

세번째 두 제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의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한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의 몸을 보여주시고, 구약성경을 깨닫게 해주시고, 자신이 왜 죽고 부활하셨는지를 알려주신다.

열두 제자의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그들이 예수를 선생으로 모시게 된 것은 영적인 의미가 있은 것이 아니라, 육적으로 예수가 메시야로서 이스라엘을 회복했을 때, 자리를 치지하게 될 것을 생각한 정도인 것이다.

 

3. 예수를 파는 유다

요한복음 6 70-7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는 자는 예수를 팔 자라는 것이다. 종교심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이렇게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종교생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자를 마귀라고 말한다. 마귀에 소속되어 있는 자라는 말이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로마를 무너뜨리고, 세상의 왕이 될 것을 기대했다. 그래서 예수를 팔아서 법정에 세우면, 분명히 그 자리에서 혁명적 사건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예수는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고 말았다.

탐욕은 누룩처럼 번져서 죄를 확산시키고 사망이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죄의 근본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죽지 않은 자는 모두 사탄의 자식이라는 말이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말을 하면서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지 않은 자는 모두 마귀의 자식인 것이다.

 

4. 베드로의 예수 부인

요한복음 1824-27절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시몬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됨을 세번 부인하였다. 당장 베드로에게 위협이 그에게 주어지므로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누가는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해두고 있다. 누가복음 22 59-62절에서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누가는 예수께서 대제사장의 뜰에 계셨고, 세 번째 부인할 때 닭이 울고 예수님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쳤음을 밝힌다. 3년간 주님을 따라 다니며 경험했던 많은 이야기들, 가슴 뜨거워진 모든 사건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주님이라고 말했지만, 육적 자아 앞에서 무너진 것이다. 가롯 유다처럼 예수를 힘있는 메시야로 생각하지 않았을지라도 육적은 죽음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5. 도마의 의심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도마만 없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말을 했을 때, 믿지 않았다. 물론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도마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은 것이다.  만일 도마 대신 다른 제자가 도마와 같은 상황이 되었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육의 눈으로 볼 때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예수님의 부활을 죽었던 육체가 다시 살아는 것처럼 오해하는데, 예수님은 죽었던 육체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몸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원래 하늘의 영생체로 있었는데, 육체에 잠시 와서, 그 육체가 죽으므로 원래의 영생의 몸의 모습으로 부활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이전의 영의 상태로 돌아간다.

사람의 육체 속에는 영이 있는데, 그 영은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영이다. 그 영이 흙이라는 육체에 갇혀있었는데, 육적 몸이 예수와 함께 죽으므로, 갇혀있었던 영이 살아나고, 예수와 함께 영의 몸을 입고 부활하는 것이다. 육체는 단지 씨껍질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육체가 죽고 난 뒤에 부활한다고 믿는 자는 도마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 성전 청소

1. 성전 타락과 성전의 무너짐을 예고

요한복음 213-14절『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개역개정)

유대인들이 지키는 3대 명절 중에 하나인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역에서 남쪽 방향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갈릴리 사역을 잠시 중단하고 힘든 여정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제일 먼저 성전 안에 들어가셨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 들어가셨을 때 놀라운 풍경을 보게 되셨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왔던 사람들은 비단 예수님과 제자들만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지역이 아닌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다. 먼 거리 여행을 하게 되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여러 가지 준비물들 중에 특히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물인 짐승을 손수 이끌고 먼 길을 이동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므로 제물을 예루살렘에서 구입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제물뿐만 아니라 로마의 경제적 지배를 받고 있었던 모든 나라들에서는 로마의 화폐를 상용했다. 이스라엘 지역에 와서는 로마의 화폐보다는 유대인의 화폐로 환전을 해야지만 제사를 위한 제물 구입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지리적 상황이 성전 이방인들의 뜰에서 제물을 구입하기 위한 환전행위와 제물로 드려질 짐승의 매매행위를 자연스럽게 정착하게 했다.

 

요한복음 215-17절『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 μ 하나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이 건축했던 성전이 아니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세 차례 세워졌다. 첫 번째는 솔로몬의 성전이고 두 번째는 스룹바벨 성전이고, 세 번째는 이두매(에돔) 출신의 헤롯이 세운 성전이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 존재했던 성전은 헤롯 성전이었다. 여기서 성전은 성전 전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이방인들의 뜰이라고 불리는 곳으로써 누구든지 원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을 가리킨다. 이방인들의 뜰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동쪽문인 미문을 통과하면 여인의 뜰이 있으며, 여인의 뜰에서 니카노르문을 통과해야지만 이스라엘의 뜰을 밟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뜰은 이스라엘 성인 남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써 가로 약 68미터에 폭이 5.5미터로 펼쳐져 있으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문이나 담은 없지만 경계 표시로 계단이 놓여 있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바친 제물이 제단 위에서 제사 드려지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뜰 앞에 있는 경계선인 계단을 넘으면 비로소 제사장들의 뜰이 있는데 여기에 제물을 바치는 제단이 있었다. 그리고 제단 앞에는 한 건물이 있는데 그 건물 안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언급하셨을 때 그 성전은 누구든지 있을 수 있는 이방인들의 뜰이었다. 여기서는 어떠한 제사 행위가 일어나는 곳이 아니었지만 왜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시는 의분을 표출하셨겠는가? 성전이라고 하는 건물은 이제 성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성전이라고 말하면서 건물은 장사꾼들이 모이는 것으로 전락한 것이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교회를 이용해서 돈벌이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시키시는 것을 감히 막지 못했던 성전 지도자들은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라고 하면서 반발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이 말을 들은 종교지도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놀랐을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이 정치적 목적으로 46년 동안 짓고 있었던 성전이었다.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 말하면서 46년 동안 짓고 있는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는 예수님을 신성모독하는 사기행각을 하는 범죄자로 결론짓고 이때부터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죽이려고 음모했다.

3년 후에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예수님을 고소했던 죄목이 마태복음 26 61절에서『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였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쳐다보고 빈정대며 욕한 내용이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여』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이 말씀은 바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하시는 것이다. 부활하신 자기의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날부터 유월절마다 수천 수만의 양을 잡아 드리는 제사의식이 사라질 것이며, 예루살렘 같은 성전이 필요 없는 시대가 올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다음에는 예수님은 성도들의 심령 속에 계시기 때문에 어디에서든지 그를 경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새로운 성전, 새로운 예배를 너희에게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222절『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에게르테 에크 네크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토 로고)을 믿었더라』

에게르테 에크 네크론(ἠγρθη κ νεκρν)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로부터 세워졌다(일어났다)는 말이다. 부활은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가 다시 사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로부터 영의 몸으로 세워져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자가 되었다 라는 의미다.

제자들이 기억한 것은 사흘만에 성전을 세운다는 말이었고, 믿은 것은 성경에서 하신 말씀과 예수께서 말씀하신 호 로고스(말씀이신 그리스도) 두가지를 믿은 것이다. 호 로고스는 성도의 심령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늘날 대부분 교회 사람들은 호 로고스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반쪽짜리 믿음인 것이다.

 

2.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역을 앞두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린 베다니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향유를 가지고 와서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았다. 요한복음 127-8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성경에 기록하여 오고 가는 세대에 전해지는 표상이 되었다.

요한복음 6 53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간접적으로 계시하신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인자의 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한다. 물세례는 죄에 대한 죽음을 나타낸다. 불세례는 엣혼에 대한 죽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죄에 대한 죽음이고, 혼에 대한 죽음이다. 인자의 살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의 몸이다. 먹는다는 말은 하나가 되어 연합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역시 영의 몸으로 현재적으로 부활하게 됨을 믿는 것이다.

비록 육체의 눈으로 인해서 부활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믿음으로 부활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살 동안에 고난과 역경이 와도 참고 전도에 매진하라는 말씀이다.

 

 

. 율법 아래 있는 자의 영적 상태

 

1. 율법 아래 있는 자의 모습

요한복음 719-21절『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헨 에르곤)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라면, 율법을 잘 지켜야 하는데, 왜 자신을 죽이려 하는가 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너희들은 율법 아래 있으므로 하나님께 죄인이라는 의미가 된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런 종교지도자들과 무리들 앞에서, 예수님의 태도는 창조 때로부터 같은 맥락으로 가르치시며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며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시면서 더 중요한 본질로 종교지도자들과 무리들을 이끌어주심을 보게 된다. 헨 에르곤(ἓν ργον)은 한가지의 사역이다. 즉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그대로 전하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유대인들의 영적 무지를 꼬집는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만일 참되시며 바른 계시를 주시는 분으로 알았다면 자신을 모를 리 없다는 말씀을 하신다.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음에도 단지 육체적인 사실만 알았다면 영적인 무지를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선민임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들은 율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래서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했어야 하는데, 그저 율법만 잘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면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교인들과 같은 것이다.

요한복음 7 22-24절『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행한다. 8째 날이 평일이든 안식일이든 상관없었다. 안식일을 어기면서 까지도 남자아이의 작은 부분을 칼로 도려낸다. 이를 통해 구별된 선민인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임을 선포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지는 모세를 통한 율법에 따라 안식일에도 태어난 지 8번째 날이 되면 유대 남자아이들은 몸의 작은 부분을 칼로 도려내고 구원받은 백성으로 선포하며 함께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을 아파 누워 있던 이를 치유 받게하고 자리를 들고 걸어갔는데 함께 기뻐해 주지 못하느냐 라는 것이다. 도리어 안식일에 치유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범법자로 몰아 죽이려 하느냐며 도리어 꾸짖으신 것이다. 안식일에 하는 행위에 대해서 모세는 괜찮고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은 왜 안되는냐 라는 것이다.

그리고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모세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무지는 인류 역사와 함께 동행하고 있다. 인류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달았던 시기는 단 한 번도 없거나, 알아도 극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께서 자신 스스로를 감추셨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마다 자신을 모든 인류에게 나타내셨다. 신명기7 9 절에서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호세아6 3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을 떠나고 반역하며, 배신했다. 출애굽기 32 8절에서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저지른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대인을 비롯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오늘날도 율법주의에 빠진 교회를 바라본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날마다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거나, 십일조를 철저히 해야한다거나, 주일성수를 해야 한다거나,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말을 하는 등의 수많은 사례를 볼 수 있다. 율법아래 있는 자들은 여전히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다. 부활을 믿지만, 육체가 죽어서 부활됨을 믿으으므로, 역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다.

 

2. 간음한 여인

요한복음 8 3-5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온 목적은 정말 여인의 음행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답에서 트집을 잡으려는 저의가 있는 질문이었다. 만일 예수님께서 잡혀온 여인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그 여인을 놔주도록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면서 어떻게 율법도 따르지 않느냐고 예수님을 비난할 것이었고, 반면에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율법에 따라 돌로 치라고 하셨다면 당시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에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사형 선고는 스스로 하지 못하도록 한 로마의 법을 어기게 되어 이 또한 예수님이 공격 당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대답이었다.

요한복음 86-8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어떤 대답을 하시더라도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한 함정을 준비하여 예수님께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엎드려 땅에 무엇인가를 쓰신다. 이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대답을 촉구하자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그들에게『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말씀하셨다.

유대인 지도자들 눈에 음행하다 잡힌 이 여인은 예수님을 잡아드릴 좋은 미끼가 될만한 사람으로, 죄를 지은 불결한 여인으로 보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사람들의 눈이 그 여인이 아닌 그 일을 행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셨고, 잠시 후 그 자리에 있던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여인의 죄를 바라보았을 때 율법에서 말하는 것처럼 돌로 여인을 죽여야 한다고 여겼지만 막상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를 보게 되었을 때 그 누구도 자신의 죄에 대해 감히 자신이 의롭다고 할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땅에 쓰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울리도록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땅에 무엇인가를 쓰신 것은 그들의 심령에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 날도 다른 예수를 믿는 자가 있다면 이는 영적 간음에 해당한다. 다른 예수는 예수라는 이름을 이용해서 장사하는 무리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경배하는 모습 등이다. 예수님은 신도들의 심령 속에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810절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님은 정죄하러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죄에 빠져있는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은 죄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죄 지은 죄인이라고 비난하던 음행한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죄의 대가를 묻지 않으시고, 그녀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음행한 여인은 범죄 현장에서 잡힌 사람이다. 하지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에 모든 사람들은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아직 범죄 현장에서 발각되지 않았지만 그들 역시 음행한 여인과 크게 차이 없는 죄인이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남의 죄를 판단하고 있으나,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이다.

인간들은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아버지 곁을 떠난 탕자와 같은 것이다. 재산을 달라고 하면 다 주는 아버지를 탕자가 버린 것처럼,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이게 탕자의 모습이고 인간의 타락성을 보여준다. 이 타락성을 깨닫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는 없게된다. 이 타락성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죄악성이 기초가 된다. 그래서 죽은 자가 되어서 아버지께 돌아가는 탕자처럼 되는 것이 회개다. 아버지를 떠난 자가 무조건 돌아가면 아버지가 다 받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죽은 자가 되어 부활생명을 믿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3. 계명을 지키는 의미

요한복음 1415절『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계시록 1412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명을 지키는 것은 문자적으로 보면, 마치 계명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을 철저히 행하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는데, 성경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기 34 1절『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처음의 돌판은 하나님이 친히 만드셔서 모세에게 주셨으나, 두번째 돌판은 모세가 만들어야 했다. 이것은 범죄한 인간이 회개하면 죄사함을 받아 회복은 되지만, 그 휴유증은 남는다는 사실을 교훈해 준다. 인간의 무능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첫번째 돌판과 두번째 돌판은 마치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아담과 같은 모양이다. 첫사람 아담은 죄의 몸을 주고, 두번째 사람 아담은 영의 몸을 주었다. 따라서 두번째 돌판은 성도의 심령 속의 세워진 성전과도 같은 것이다. 첫번째 돌판은 깨어지고(죽고) 두번째 돌판이 새로 새겨져(다시 태어나)언약궤 안에(성도의 심중의 성전 안에) 들어있다. 시편 408절에서『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두번째 돌판이 심중에 있다는 것이다.

두번째 돌판은 새로운 법으로서 그리스도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다.고린도전서 921절에서『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첫번째 돌판이 주어졌는데, 인간은 도무지 지킬 수 없음이 금송아지 사건을 통해서 나타났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넘치게 된다. 그게 두번째 돌판인 것이다. 그래서 두번째 돌판과 함께 여호와의 이름이 선포되는 것이다. 첫번째 돌판은 첫사람 아담, 죄에 대한 것이라면, 두번째 돌판은 마지막 사람 아담, 은혜에 대한 것이다. 첫번째 돌판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면, 두번째 돌판은 부활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17절에서『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마태복음 913절에서『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23절에서『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성도와 함께 심령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여호와이신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고,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성전)가 세워지고, 그 속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지 않는다면, 여호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을 십계명을 통해서 알려주신다. 이 말을 행하여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의 뜻을 잃지 않고 간직하라는 말이다. 계명을 지킨다에서 지킨다는 말은 잃지 않고 지켜 보호한다는 말이다. 가짜 선지자들들이 성경을 왜곡하므로 마음에 이 의미를 잘 지켜 나가라는 말씀이다.

 

4. 죄인과 의인

요한복음 935-36절『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에이스 톤 휘온)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인자는 하나님의 그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아들이다. 인자를(에이스 톤 휘온 εἰς τν υἱὸν) 믿느냐 라는 말은 인자 속으로 들어가서 믿는냐 라는 말이다.

요한복음 9 37-41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튀플로이 에스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바리새인들 중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우리가 하늘에 대해서 소경인가 라는 말이 툭 튀어나온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맹인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영적 맹인인 것이다. 맹인이 눈을 뜬다는 것은 하늘의 일에 대해서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마태복음 13 34-35절에서『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맹인이 눈을 뜨는 것에 대해서 이사야 35 5절에서『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라고 말했다. 

마태복음 11 5, 누가복음 4 18절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맹인이 눈을 뜨게 되면,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되는 것이다. 죄는 세상에서 지은 죄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떠난 것을 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창세 전에 사탄을 따라간 범죄한 영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육에 갇힌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소경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갇힌 영들이 눈을 뜨게 되면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영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 16-24절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소경이라고 표현하셨다. 율법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말하는 바리새인들을『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말씀하셨다. 오늘날도 율법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만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소경인 것이다. 율법의 규정에 매여있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소경들이다. 소경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죄인들인 것이다.

율법을 지켜 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고,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죄인들이며,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에서 연합되어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되어 믿을 때 그 역시 현재적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나, 성도의 한 개인에게도 죄인과 의인이 있다. 죄인은 심령 속에 죄를 짓게 하는 옛성전이 있고, 그 속에 옛사람이 있다. 의인은 현재적 부활을 믿으므로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지고, 그 속에 새사람이 있다. 옛사람을 죄인, 새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한 사람의 심령 속에 두가지의 경우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육적 마음을 따르는 자(육적자아)는 염소가 되고, 영의 마음을 따르는 자(영적 자아)는 양이 되는 것이다. 이 둘이 날마다 심령 속에 싸운다. 육적 자아(옛사람)는 죽음의 대상이다.

로마서 85-9절에서『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 말씀은 대상을 두명을 두고 말을 하지만, 마찬가지로 한명의 대상을 두고 말을 하기도 한다. 신도의 심령 속에 두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쪽을 따를 것인가 라는 문제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마음의 주인이 육적주체이므로, 싸울 대상이 없는 것이다. 문제는 성령 세례를 받고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의 마음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마음의 주인이 영적주체가 되지만, 그 속에 남아있는 육적 마음이 적이 되어 공격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잘 분별하라는 것이다.

 

3.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1. 대속의 죽음의 의미

요한복음 1150절『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은 대속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속량이다. 속량은 노예를 돈으로 사는 의미를 갖는다. 사람들은 사탄의 노예인데, 하나님이 예수의 피값으로 사는 것이다.

레위기 23 26-29절『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어떤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속죄일은『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것이다. 나팔절부터 10일간은 고통과 환란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10일간이 끝나면 속죄절이 되고, 속죄절 5일 후에 초막절이 시작된다. 나팔절은 추수가 끝났다는 의미다. 오순절부터 넉달동안 추수가 완전히 끝나서 나팔을 분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말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잘 기억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절기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린양으로 죽으시고, 초실절에 부활하셨으며,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다.

레위기에 다섯가지의 제사가 나오는데, 레위기 4 20절에서『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다섯가지의 제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끝에는 반드시『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속죄의『속』이라는 말은 영어로 redeem(도로 사는 것)인데,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17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에서 『곧』이라는 말은 속량과 죄 사함이 동의어의 개념이 아니라,『이어서』라는 개념이다. 속량이 있어야, 죄사함을 받는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속량은 레위기 4 20절의『속』을 인용한 것이다. 속량은 대속, 구속이라는 말로도 사용된다. 구입(Purchase)한 후에 해방(delieve)된다는 말이다. 죄를 씻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죄인을 사서 해방되는 것이 먼저다. 이것의 개념이 바로 욤키프러다.

창세기 6 4절에서『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욤키프러의 명사형이 역청이다.『칠하라(덮으라)』는 말이 카파르다. 구약시대 성소 마당에 놋 제단이 있었다. 어린양에게 안수를 하면서 모든 죄를 전가시킨다. 이것도 redeem이라는 단어다. 그래서 죽은 어린양과 죄인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게 회개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속죄가 된다. 그 다음에 물두멍 대야에서 손과 발을 씻어준다. 씻은 다음에 성소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성소 안에는 덮개가 있는데, 이 덮개가 바로 이 단어다. 지성소에는 1년에 한번(음력 7 10) 들어가는데,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고, 그 위에 속죄소라고도 하고 시은소라고도 하는 덮개(히브리어로 코페르트:은혜로 덮었다는 뜻)가 있다.

모든 죄인들의 죄를 덮는 날이 바로 욤키프러였다. 그래서 1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시은소 위에 피를 뿌려, 그 피가 덮어지는 것이다. 신약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주님이 죄인들을 피값으로 사는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휘장이 찟어짐) 부활하셔서, 대제사장으로서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갔으므로, 하나님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를 사탄으로부터 피값으로 죄인을 사는 것이다.

『속』이라는 말은 덮혀지는 것(카파르)이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부터 덮혀지는 것이다. 그래서 속량이 없는 죄 사함은 없다. 하나님이 사는 자는 죄인이 회개하여 돌이키는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 죽게해서 사는 것이다. 놀라운 은혜다. 회개하는 자에게만 자기 아들의 죽음의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이 된다.

오늘날 교회에서 속량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다. 욥기 1925절에서『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오늘날도 욥처럼 사탄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치도록 하락하셨다. 그래서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는 자를 구속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 주시는 것이다.

여기에서『대속』이라는 말은『가알』이라는 말이다. 룻기에서 룻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은 남편의 땅을 대신 지불하여 사줄 수 있어야 한다. 사주는 것은 책임을 져주는 것이다. 이게 사랑이고, redeemer라는 단어다. redeemer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세가지가 있다.『코페르, 파다, 가알』이다. 포로나 노예를 대가를 주고 사서 자유롭게 해 준다는 말이다.

히브리 백성이 바로의 압제 아래 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해방시켜준 것을 출애굽기 6 6절에서『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신명기 7 8절에서도『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속량이 해방이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2.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다

요한복음 12 1-11절『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가족처럼 지내던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 집에 방문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과 가까워,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죽을 수도 있는 곳이었다.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유대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잡아들이기 위해 이미 체포 명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로 가족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주님을 위해 잔치를 준비하였다. 여기에는 네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첫째는 마르다이다. 마르다는 직접 식탁을 준비하고, 시중을 들면서 마음의 존경심과 사랑을 표현하였다. 이전에 분주한 일로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그런 책망을 핑계로 불편한 마음을 갖지 않았고, 마르다는 자신이 가진 은사를 따라 변함없이 계속해서 주님을 섬기고 봉사했다. 마르다가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즐거운 방법은 대접을 위해 손으로 직접 일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나사로다. 나사로는 이 잔치가 있게 된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였다. 몸이 약해 죽었다가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살아난 기적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예수님을 직접 전하고 증거 하는 역할을 맡았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나사로의 증거와 섬김으로 인하여 복음의 도구로, 통로로 쓰임 받게 되었다.

셋째는 마리아다. 마리아는 그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으로, 특별하게 예수님께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였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향유를 그의 발에 부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심을 믿는 것이다.

넷째는 가롯 유다다. 가롯 유다는 마리아의 사랑의 행동을 트집 잡았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가롯 유다는 멋진 명분과 그럴듯한 논리로 사람들에게 그의 불만을 표시했다. 유다는 자기 본심, 욕심에 가득 찬 속마음을 드러내는 말을 함으로 잔치의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었다. 예수님에 대한 어떤 사랑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신앙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자기의 욕심을 포장하는 것이다. 자기 스승을 배신하고, 은전 30에 팔아버리는 유다의 행동은 예수님에게 깊은 사랑과 헌신을 보여주는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 하는데서 시작된다. 유다의 잘못은 탐욕의 마음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면서도, 가난한 사람을 들먹이는 위선적 태도를 가진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유다는 자기 눈앞의 계산과 욕심뿐이었고, 그날 잔치에 모인 사람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사건과 장례에 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성경에 기록하여 오고 가는 세대에 전해지는 표상이 되었다.

 

3. 수난과 십자가

요한복음 19 1-3절『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권력을 가진 자가 갖는 오해와 하나님에 대한 유대인의 모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첫 번째 이야기는 빌라도의 오해. 예수님의 말씀과 위엄에서 그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안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말에 심한 두려움을 느끼며 더욱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다.

그는 관정으로 다시 들어가 예수님에게 진지하게 묻는다.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다. 빌라도는 초조한 마음으로 말했다.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빌라도는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판결을 내릴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식민지에서 총독이라는 지위와 권한은 최고이자 막강한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가 오해했던 것은 그 권한과 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얻은 거라 생각하여 자기가 맘껏 누리고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선처로 풀려나실 의도가 전혀 없으셨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권력자의 권한이 어디에서 오는지 명확하게 알려주신다.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두 번째는 유대인들의 모순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을 재판하던 빌라도 총독은 어떻게 해서든지 죄가 없는 예수님을 놓아주기 위해 백성들을 설득하고 회유하며 방안을 제시하지만 유대인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그러나 빌라도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에는 예수님을 군인들에게 채찍질하고 모욕을 주도록 넘겼다. 백성들이 모진 고문으로 고통과 조롱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보면 그들의 성난 마음이 풀릴 것으로 생각했다. 로마 군인의 채찍질은 살이 패이고 찢어지는 고통을 수반하는 잔인한 고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다. 백성들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 지르는 대제사장들이 말하는 예수님의 죄목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이다.

빌라도는 이미 예수님을 심문하여 그 말이 사실일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빌라도는 자기 앞에 끌려 온 그리스도의 모습은 정말 볼품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자 천하고 비루한 모습의 한 인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엄을 범접해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이다. 빌라도 같이 세속적인 인간에게도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큰 영향을 끼쳤다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치 장난하듯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하려드는 자들은 빌라도보다도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또 하나의 모순은 유대인의 왕에 관한 것이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과 언약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선민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통치를 받는 나라요 민족이다. ,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시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백성이 되게 하셨다. 그런데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대인의 왕인 예수님을 『우리의 왕이 아니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이방인인 빌라도는 예수님을 『너희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며 왜 너희의 왕을 죽이려고 하느냐고 설득하며 놓아주려고 안간 힘을 쓰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인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그 어떤 왕도 없다고 소리를 지르며 없애버리라고 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유대인들은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그리고 왕이신 예수님을 죽여 없애버리라고 유대인들은 외쳤다. 이것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유대인들이 대제사장에게 선동되어 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이스라엘은 눈이 감겨져 있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미리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해골, 즉 죽음을 의미하는 골고다로 가셨다. 십자가형을 받은 죄수는 십자가의 가로대를 짊어졌다. 나머지 세로대는 형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자기 몫의 가로대는 자기 죄이고, 자기 몫의 가로대를 진다는 것은 자기 죄를 짊어짐이다. 예수의 좌우편에 함께 못 박힌 자들 역시 자기 죄를 짊어지고 고통 속에서 십자가에 매달렸다. 인생은 자기 죄를 짊어지고 죽음으로 나아가는 죄수의 행렬이다. 자기 몫의 가로대를 짊어지고 애써 오르면 죽음의 세로대가 기다리고 있다. 고통은 순간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빌라도는 예수의 죄목을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쓸 것을 요구했다. 로마 황제가 지목한 왕 외에는 왕이 될 수 없었고 황제가 예수를 왕으로 임명한 적이 없었으니 유대인의 왕 예수는 반역자였다. 법적 논리가 그러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가 누명이라면, 음모라면, 정치적 술수라면 그 십자가에 걸쳐 있는 죄는 예수의 것이 아니다. 그 죄는 누명을 씌운 자, 음모를 꾸민 자, 정치적 술수를 쓴 자의 것이 되어야 마땅하다.

십자가의 가로대를 짊어져야 하는 자는 바로 그 죄를 진 자들이어야 한다. 내가 짊어져야 할 가로대를 남에게 지우는 것은 자기 죄를 쌓아올리는 것과 같다. 예수의 눈길이 머문 곳은 이리 같은 군인도, 늑대 같은 대제사장도 아니었다. 남의 죄를 자기 것처럼 짊어진 예수는 죽음의 자리에서 어머니를 향해 눈길을 둔다.『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그리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눈길을 돌렸다.『보라 네 어머니라』타인의 죄를 자기 것처럼 짊어진 예수의 눈길이 머문 곳은 어머니와 제자였다.

예수께서 죽음의 자리에서 눈에 담은 것은 그들을 향한 사랑이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그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모든 인류를 대속하는 죽음이었다. 그 죽음이 없었다면, 모든 인류는 구원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진노만 있을 뿐이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십자가)와 사랑(부활)을 동시에 보여주신다. 하나님의 공의(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고 사랑(부활)만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절반 밖에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는다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말씀을 응하게 하시는 분이셨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시편 69 21절인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라는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신 포도주는 식초와 같다. 목이 마를 때 물이나 포도주가 아닌 식초를 마신다는 것은 오히려 더 고통스럽기에 차라리 마시지 않는 것이 낫다. 비록 사람들이 예수님을 놀리기 위해 식초인 신 포도주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식초인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시며 돌아가셨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일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영들이 첫사람 아담으로부터 세상으로 내려가고, 마지막 아담으로부터 하나님 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는 첫사람 아담의 죄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리스도는마지막 아담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그래서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아담이 연결된다. 요한복음 151절에서『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첫사람 아담과 함께 세상에 죄의 몸을 입는 천사의 영이, 다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의의 옷을 입은 천사들이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 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이 방주 안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려면 육의 몸을 벗고, 영의 몸(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만 한다.

또한 예수님의 시신은 십자가에 달린 두 죄수와는 달리 그 다리가 꺾이지 아니하셨고 창으로 옆구리가 찔리셨는데 이것 역시『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처럼 구약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이 그대로 다 이루어지는 통로가 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믿지 않고 희롱했던 유대인들과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이었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희롱하던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과 빌라도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성경 말씀을 이루어지게 하는 통로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통로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과연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지게 하는 통로로 사용되느냐는 점이다. 예수님을 신 포도주로 희롱하고 창으로 찌르는 비참한 상황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이루어가는 통로가 된 유대인들이나 로마 군인들이 아닌, 아름답고 진실하며 소망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가는 통로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부활

 

1. 부활

하나님 나라와 하늘 나라(천국)은 같은 것인가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부분 신도들은 말하기를『마태가 복음서를 쓸 때, 그 대상을 유대인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불경스럽게 여기므로 하늘 나라라고 했다는 설이다』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하늘 나라는 표현방법일 뿐 같은 의미라고 말들도 한다. 그들의 소견대로 말을 하지만, 헬라어성경을 정확히 이해하고 말을 해야만 한다.

마태복음 3 2절에서『회개하라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 βασιλεία τν ορανν")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톤 우라논이 하늘에 해당된다. 그런데, 『톤 우라논(τν ορανν 하늘)』이 마태복음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도 사용되었다.

누가복음 2450-53절『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톤 우라논 τν ορανν)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마가복음 1619절에서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톤 우라논 τν ορανν)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이야기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려지셨으며,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마태복음에만 사용되었다는 말은 틀린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와 하늘 나라는 단순히 같은 의미다 라고 말을 한다면, 왜 혼란스럽게 용어를 통일하여 사용하지 않고, 이 말을 사용했다가 저 말을 사용했는가 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헬라어 성경에서, 하늘(톤 우라논)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에풀라니오스는 하늘 또는 하늘의 처소로 번역된다.

에베소서 25-6절『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에풀라니오이스 πουρανοις)』성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히셨다고 한다.

고린도전서 1548절에서『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풀라니오이스 πουρανοις)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톤 우라논과 에풀라니오이스(ἐπουρανοις:하늘의 처소들)는 관사가 있는 복수 형태로 되어있으므로, 성도들의 심령 안에 임재하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성부 하나님 나라를 표현할 때는 테스 바실레이아 투 데우(τς βασιλεας το θεοῦ: 하나님 왕국)로 표현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나라에 승천했다는 말이다. 하나님 왕국과 하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론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삼위일체 이론은 『성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 의한 성도』로 인식되어야 한다. 삼위일체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도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도구임을 잘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 왕국과 하늘나라(천국) 역시 사람이 이해될 수 있는 수준에서 성경은 말을 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 왕국이나 하늘나라(천국)는 하나이다. 그러나 사람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성경은 설명한다.

첫째하늘은 보좌에 계신 성부의 하나님 왕국을 의미한다. 성부 하나님이 영으로 임재하는 하나님 나라이다. 아무도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디모데전서 6 16절에서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둘째 하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영의 몸을 입고 임재하시는 아들의 나라이다. 골로새서 1 12-13절에서『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마가복음 169절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고 말을 한다. 둘째 하늘을 하나님 왕국의 우편이라고 표현된 것이다.

셋째하늘은 성도에게 임재하는 하나님 나라이다.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12 2절에서 셋째하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성도가 현재적으로 부활을 믿게되면,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지는데, 이 새성전에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재림하여 들어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부어주신다. 에베소서 26절에서『성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라고 말을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셋째 하늘의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에덴동산이라고 하기도 하고, 새하늘과 새땅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이지만 셋이다.

첫째하늘과 둘째하늘과 셋째하늘은 성령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행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세가지의 형태로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안』이라는 말은 고린도후서 5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이 말은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가 되는 것이다. 역시 로마서 6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새 피조물, 새생명은 부활생명이다. 사람은 영적 존재인데, 영이 흙에 갇혀 있는 것이다. 육체가 죽으면, 흙으로 가지만, 영은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야만 한다. 전도서 127절에서『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영이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전도서 321절에서『인생들의 혼(프뉴마)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프뉴마)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프뉴마는 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귀절을 보고 동물도 영이 있구나 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하늘로 올라가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의미하고, 땅으로 내려가는 자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를 의미한다. 땅은 스올(음부)라는 말이다. 둘째 사망의 심판을 받게 된다. 예수와 함께 죽고, 현재적으로 부활한 것을 믿지 못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이라고 말씀을 한다. 부활이라는 말에 대해서, 육신의 입장에서 보면, 육이 부활한다고 믿게 되지만, 영의 입장에서 보면 원래 하늘의 생명인데, 흙에 잠시 갇혀 있다가 다시 하늘의 생명이 부활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생명이므로, 육이 죽고, 하늘의 생명으로 부활한 것이다. 그런데도, 육이 부활했다고 주장한다면, 육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생명(부활생명)에 대해서 구약시대에서 부터 계속 사람들의 문을 두드려 왔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구약성경에서 자신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육신의 몸으로 아브라함에게도 나타나시고, 다양하게 임재하신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천하만민 중에 이스라엘을 모델로 택하시고, 언약을 통하여 하늘 생명을 주시겠다고 사람들의 심령을 두드렸지만, 깨닫고 문을 여는 자는 믿음의 선진 외에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육신의 모습으로 세상에 와서 다시 모든 사람들의 심령 속위 문을 두드리셨다. 천국(하늘 나라:부활생명)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648-50절『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마태복음 77-8절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요한계시록에서도 320절에서도『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은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 이유는 마음 밭이 굳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좋은 밭이 되야만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게 천국의 비밀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자신이 육의 마음인지, 영을 향하는 마음인지 계속 상고해 보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사람들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사건이 있었다. 간음한 여인의 사건이었는데, 돌을 들고 치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땅에 무엇인가를 쓰고,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 땅에 쓴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는 것과 같은 의미다.

예수님은 하늘의 생명(부활생명)에 대해서 요한복음 1125-26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예수님 자신이 부활생명이라고 밝히셨다.

예수님은 떡 세덩이 비유를 하셨다. 누가복음 115-9절『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친구)은 예수님을 의미한다. 떡 세덩이는 부활생명을 상징한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활생명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비록 침실에 누워 있을지라도 빌려준다는 것이다. 빌려주는 의미는 다시 갚아라는 것이다. 부활생명을 갚는 일은 부활생명을 받은 자가 다른 이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열처녀의 비유에서도, 미련한 다섯처녀는 기름이 부족하여 혼인잔치 문을 들어갈 수 없었다. 기름은 바로 부활생명을 의미한다. 성령(기름)세례를 통해서 부활생명이 들어오는 것이다. 처음에는 기름이 있었지만, 기름이 다 소모된 것이다. 이는 부활을 믿지만, 육체가 죽어서 부활된다는 믿음이다. 육체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을 생각하는 자는 기름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영으로 모든 사람들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 다시 문을 두드리셨다. 베드로전서 318-19절에서『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옥은 육체를 의미한다. 모든 사람의 영은 육체라는 흙에 갇혀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자가 있었을 것이다. 요한복음 525절에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그러나 음성을 듣지 못하면, 노아의 홍수때 회개하지 않은 자와 같다는 말씀이다. 그들에게는 심판이 기다리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320절에서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하늘 생명을 받아드리는 자는 극히 적은 숫자임을 보여주신다. 출애굽 당시 가나안에 들어간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명이었다. 물론 19세 이하의 어린아이와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도 들어갔지만, 애굽으로 나온 성인 중 두명만 가나안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광야에서 다 죽었다. 현재적 부활생명을 찾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승천 후에도 성도의 심령 속으로 재림해 들어가서 성도를 통하여, 사람들의 심령을 두드리고 있다. 현재적 부활생명을 받아드려라는 것이다. 회개하면 받을 수 있다. 회개가 바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구약시대, 죄인은 율법에 따라 죄를 지으면, 희생양을 가지고 성소뜰에 들어서는데, 죄인이 동물의 머리에 손을 대고 죄를 전가시키고, 그 양을 죽여 피를 담아 제사장에게 건넨다. 제사장은 제단에 피를 뿌리고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죽은 희생양이 누구인가 라는 것이다. 바로 그 죄인이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죽은 시체, 불에 태워지고(불세례), (물세례)뿌림을 당한 양이 바로 자신임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어있는 시체는 누구인가?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닫지 못하면, 회개하지 않은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아 마땅한 자라는 것을 깨닫는데서 시작한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마음 속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죽으라는 것이다. 그 죄가 바로 하나님 처럼 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로마서 67절에서『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난다』고 말을 했다. 오늘도 하나님은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현재적으로 십자가에서 죽고 현재적으로 부활생명을 받으라고 말이다.

 

2. 제자들에게 부활의 몸을 보여주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게 된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 무덤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2017절에서는『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핲투)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핲투는 붙들어서 끌어안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는 예수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다. 그리스도께서 아직 아버지 집으로 아직 가지 않으므로 붙잡지 말라는 것이다. 당분간 마리아와 제자들과 세상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를 만나서 대화를 했지만, 자신의 부활의 몸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요한복음 2019-20절에서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제자들이 마리아의 말을 듣고 부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놀란 것이다. 분명히 문을 닫았는데 예수님이 벽을 뚫고 제자들에게 들어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체는 이 세상의 육체와는 다른 몸인 것이다.

요한복음 2024-25절에서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가 자리에 없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말하였지만, 자명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돌 무덤에 묻힌 죽은 이가 눈 앞에 나타났다는 동료들의 말을 도마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간의 경험과 지식 안에서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는 일은 불가한 일이었기에 도마는『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한다. 부활은 인간이 보고 생각하는 인식체계를 넘어서는 신비이기에 도마가 아닌 누구라도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부활은 신비다. 물리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이고 신비다. 물과 성령으로 난 자들도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경험과 지식의 문을 닫고, 하나님의 신비를 향해 나아갈 때 시작된다. 부활하신 하나님의 신비를 향해 문을 활짝 열었을 때, 부활 안에서 육의 몸은 죽고, 영의 몸으로 태어나게 된다.

요한복음 2026-27절에서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했다. 그런데, 누가복음 2438절에서는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를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ατός ψηλαφήσατέ με κα δετε τι πνεμα σάρκα κα στέα οκ χει καθὼς μ θεωρετε θεωρετε χοντα다시 번역해 보면, 그는 나를 만지고 영의 몸이라는 것을 보았고, 나는 뼈를 가진 너를 보듯이 뼈가 없다.』 도마가 본 것은 예수님의 죽은 상태에서 있었던 못자국과 창자국이 아니라, 그 자국들이 변신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는 모습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놀라고 기뻐한 것은 도마와 같이 그런 부활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한글 개역개정은 마치 예수님이 살이 있고 뼈가 있는 것처럼 번역이 되어서, 이전의 몸으로 돌아갔구나 라고 착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몸은 영의 몸(πνεμα σάρκα 프뉴마 사르카)이다. 그리고 뼈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사람이 움직이기 위해 뼈가 필요하듯이 그런 몸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죽기 전의 육체의 몸은 죽어야 할 사람의 몸이다. 죽어야 할 사람의 몸을 성경은 죄의 몸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는 첫사람 아담의 몸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6 6절『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죄의 몸은 거룩한 몸으로 될 수 없다. 죄의 몸은 죽어야 하고, 새생명인 영의 몸이 태어나는 것이다. 새생명은 부활생명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하늘로 부터 난다. 하늘로부터 난 자를 거룩한 자라고 베드로는 말을 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 16절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διτι γγραπται · γιοι σεσθε, τι γ γιος.) γενεσθε(게네스데)γγνομαι(기그노마이:태어나다, 생산되다 라는 의미) 2인칭 수동태로서 『거룩으로 태어나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번역하면,『나는 거룩이니, 너희들은 거룩으로 태어나라(거듭나라)』는 의미다.

로마서 6 8절『 만일(에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아페다노멘)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쉬제소멘)을 믿노니(피스튜오멘πιστεομεν)ε δ πεθνομεν σν Χριστ, πιστεομεν τι κα συζσομεν ατ,(헬라어 성경)

에이(εἰ)는 가정법 접속사이다. 어떤 사실이 일어난 것으로 간주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라는 것이다. 아페다노멘(πεθνομεν)은 아오리스트 시제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순간적으로 죽었다는 말이다. 쉬제소멘(συζσομεν)은 우리가 함께 새생명이 된다 라는 미래시제다. (함께)와 자오(살다)의 합성어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유한 존재(공생관계)가 된다. 성령을 받을 때 순간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성도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태어나 거룩한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비록 죽어야 할 육신이 있어도 영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3. 성도들에게 현재적 부활이 이루어지는 모습

고린도전서 1551-52절『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코이메데소메다)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ἐν τμ, ν ιπ φθαλμοῦ)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호 네크로이)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코이메데소메다(κοιμηθησμεθα)는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호 네크로이(ο νεκροὶ)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자들이다. 그런데, 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홀연히 변화를 받아서 영적으로 일어난다는 말이다. 홀연히(ἐν τμ, ν ιπ φθαλμοῦ)  라고 번역했는데, (엔 아토모 엔 리페 옾달무)눈 깜빡하는 순간에 라는 말이다.

눈깜빡 하는 순간에 성도의 심령 속에 새성전이 들어서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옛성전은 죽고, 새성전이 들어서는 것이다. 육적 주체에서 영적 주체로 바뀌는 순간이다. 새성전이 심령 속에 들어서도 옛성전의 파괴된 모습은 그대로 남아있다. 완전 파괴될때까지 육적자아와 씨워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일곱 족속과 싸운 것과 같은 이치다.

베드로후서 3 10절에서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후 우라노이)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파렐류손타이) 물질(스토이케이아)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휴레데세타이)』 주의 날은 마지막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마음 속에 새성전이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의 심령 속에 들어오는 날이 어떤 사람은 빨리 어떤 사람은 늦게 찾아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함께 죽은 자의 심령으로 재림하여 들어와 하나님 나라(천국)이 임재하는 것이다. 후 우라노이(ο ορανο)는 마음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파렐류손타이(παρελεύσονται)는 파라(옆에서) 류손타이(오다)의 합성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임재(파루시안)하는 것이다.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간다고 번역했는데, 아마도 예수님의 재림을 염두에 두고 번역한 것으로 보여진다.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는 것은 육적 몸(옛사람)이 죽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스토이케이아(στοιχεα)는 원소(물질)라는 의미다. 휴레데세타이(ερεθήσεται)는 드러나다 라는 의미다.

현재적으로 살고 있는 성도들은 육적 몸()이 죽고, 하늘로부터 영의 몸으로 태어나, 호 로고스(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파루시안(παρουσαν 임재)하게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공중(심령 속의 하늘 나라)에서 주를 영접할 것이다(카타베세타이καταβσεται.)

데살로니가전서 416-18절『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이 성경 귀절로 인하여 많은 오해가 있는데, 신도들이 예수님의 재림시에 들림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세상이 종말이 되어가고 자신들은 휴거 준비를 하자 라는 황당한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4. 부활의 몸이란?

첫째, 부활이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인가, 아니면 영적으로 부활이 일어나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이라고 말씀을 한다. 부활이라는 말에 대해서, 육신의 입장에서 보면, 육이 부활한다고 믿게 되지만, 영의 입장에서 보면 원래 하늘의 생명인데, 흙에 잠시 갇혀 있다가 다시 하늘의 생명이 부활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생명이므로, 육이 죽고, 하늘의 생명으로 부활한 것이다. 그런데도, 육이 부활했다고 주장한다면, 육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0 35-36절에서"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그리고, 마태복음 22 30"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라고 말을 한다. 천사는 영이다. 그래서 부활은 죽었던 영이 생명의 영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2024-25절에서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가 자리에 없었다. 다른 제자들이『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말하였지만, 자명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돌 무덤에 묻힌 죽은 이가 눈 앞에 나타났다는 동료들의 말을 도마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요한복음 2026-27절에서『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했다. 그런데, 누가복음 2438절에서는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를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ατός ψηλαφήσατέ με κα δετε τι πνεμα σάρκα κα στέα οκ χει καθὼς μ θεωρετε θεωρετε χοντα

다시 번역해 보면, 그는 나를 만지고 영의 몸이라는 것을 보았고, 나는 뼈를 가진 너를 보듯이 뼈가 없다.』 도마가 본 것은 예수님의 죽은 상태에서 있었던 못자국과 창자국이 아니라, 그 자국들이 변신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는 모습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놀라고 기뻐한 것은 도마와 같이 그런 부활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한글 개역개정은 마치 예수님이 살이 있고 뼈가 있는 것처럼 번역이 되어서, 이전의 몸으로 돌아갔구나 라고 착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몸은 영의 몸(πνεμα σάρκα 프뉴마 사르카)이다. 그리고 뼈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사람이 움직이기 위해 뼈가 필요하듯이 그런 몸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죽었던 사람들을 다시 살리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이 나사로와 나인성 과부의 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다. 만일 부활이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으면, 이들은 다시 살아났으므로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의 몸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라고 분명히 말했다.

고린도전서 1521-23절에서『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기 전에는, 부활한 자가 없었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313절『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라는 분은 누구인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성육신으로 예수님이 성령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으로 태어난 예수만이 부활의 첫 열매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부활의 몸을 영의 몸이라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535-38절에서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농부가 씨를 뿌리지만, 장래의 형체를 뿌린다는 것이다. 나중에 씨가 열매가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씨를 뿌린다는 것이다. 씨껍질이 죽고(사라지고) 그 속에 있는 씨눈이 자라서 다른 형체로 바뀌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42-44절『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엔 아프타르시야) 살아나며(에게이레타이)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소마 프뉴마티콘)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엔 아프타르시야(ν φθορ)는 영생 안에서, 에게이레타이(γερεται)는 일어난다는 말이다. 영원한 생명 안에서 영이 일어나는 것이다. 한글 개역개정은 다시 살아난다 라고 번역하므로 마치 죽었던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오인하게 한다. 신령한 몸이라고 번역된 소마 프뉴마티콘은 영의 몸이다. 부활은 육의 몸이 아니라 영의 몸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고린도전서 1550『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하이마)과 육(사륵스)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요한복음 6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갈라디아서 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처럼 수많은 성경 귀절을 통해서 영의 부활임을 말해주고 있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부활이 육체가 죽은 후에 일어나는 미래적 부활인가, 아니면, 현재적 부활인가?

로마서 65절에서『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그의 죽으심과 연합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부활의 연합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123-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는데, 예수님이 마르다의 집에 있었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르다가 말했다. 11 22절에서 마르다가 말하기를『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하면 무엇이든지 다 주실 것을 믿는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예수님이『다시 살리라』라고 했는데, 마르다는『다시 사는 것』을 현재적이 아닌, 육이 죽은 후 미래 마지막 날 부활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현재적이다.

예수님이 11 23-26절에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은『나는 항상 부활이요 생명이야, 나를 믿는 자는 영이 죽었었지만 살아나고, 영이 살아나면 하늘로 부터 오는 믿음의 선물을 받아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을 육의 관점에서 보면『나를 믿는 자는 육이 죽지만 언젠가 살아나고, 육이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문장의 구조가 대단히 어색하다. 성경의 말씀은 영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신도들은 육의 부활로 생각한다.

고린도후서 5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이 말은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가 된 것이다.

요한복음 648-50절『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은 부활생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않는 것으로 말한다. 죽지 않는 것은 육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되어 영의 몸으로 영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4. 승천과 성령세례

 

. 승천

1. 그리스도의 승천

요한복음 662

그러면 너희는 인자(안드로푸)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안드로푸(ἀνθρπου)는 히브리어 아다마와 같은 단어이다. 아다마는 첫사람 아담을 의미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을 표현한다. 마지막 아담은 하늘로부터 온 자라는 말이다. 이 말은 첫사람 아담도 하늘로부터 온 자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들도 하늘로부터 온 자들이라는 것이다. 인자라고 표현된 안드로폰은 원래 하늘에서 내려왔으므로 하늘로 올라가셨다.

골로새서 117절에서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요한복음 151절『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인자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범죄한 천사들이 첫사람 아담과 함께 이 땅으로 내려오고, 다시 마지막 사람 아담과 함께 하나님 나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승천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셨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원래 천사와 같은 자리에 돌아감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부활논쟁에서 부활의 상태는 천사와 같다고 표현했다. 마태복음 2230절『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누가복음 2036절에서는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요한복음 142-3절에서『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그리스도의 승천은 성도들의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했다. 천사들이 범죄하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거처를 빼앗아 버리고, 흙에 가두어 인간이 되게 했는데, 회개하여, 육의 몸을 벗고, 영의 몸을 입고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게 되었으므로 원래 있던 거처로 돌아가게 된다.

고린도후서 5 1-2절에서『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베드로전서 322절에서『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그리스도는 승천하시어, 하나님 자리로 돌아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엘리야(요한)의 승천

열왕기하 211-15절『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

엘리야의 승천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모형이자 구속함을 입은 모든 성도들이 누리게 되는 부활과 승천에 대한 예표라고 할 수 있다. 불수레와 불말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는 말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나뉘어졌다는 말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영의 몸을 입고 있으며, 제자들은 여전히 육의 몸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세례와 불말은 창세기 324절에서 그룹들(천사들)과 두루도는 불칼에 해당된다. 제자들도 승천하기 위해서는 육의 몸이 불칼을 맞아 죽어야 한다(불세례)는 의미다.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였다. 그래서 엘리사는 자기의 옷(옛혼)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불세례는 혼에 대한 죽음(십자다의 죽음 예표)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겉옷(부활의 예표)을 주워서 입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하늘 생명의 영의 몸을 입었다는 말이다.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쳐서 강이 갈라지니 강을 건넌 것이다. 이는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요단강을 치니 강이 말라버렸던 것이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영으로 온 자였다. 누가복음 117절에서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엘리야는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자였다. 말라기 31절에서『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엘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먼저 와서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했다. 그는 예수님의 복음 전파를 예비하는 자였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예고 하는 것이다.

 

. 세례

1. 물과 성령과 피

요한일서 56-8절『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의 증거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물은 율법을 의미한다. 율법 속에 감추어진 그리스도이시다. 피는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속에서도 계시며, 율법 시대가 끝난 세례요한 이후로는 직접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다.

증언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율법 속에서도,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도,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이후에도 증언하신다. 율법 속에 있는 예수, 세상에 육신으로 오셔서 율법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바로 증언하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증언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5 26-27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현재적 부활에 대해서 말을 하면 교회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이신 성령이 증언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물과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며, 나아가 성령세례를 받고 하늘생명인 부활의 몸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가 되는 것이다. 말씀을 전하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을 전하는 자가 된다. 그러나 오늘날 말씀을 전하는 것은 육체가 죽고 난 뒤의 부활을 전하고, 심령 속으로 들어오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하지 않는 것이다.

 

2. 물세례

요한복음 35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은 물세례를 의미하며,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을 의미한다. 죄에 대해 죽으므로,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선한 마음이 주어진다. 베드로전서 321절에서『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로마서 63절에서도 세례를 표현한다.『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세례는 물세례와 불세례가 있다. 물세례는 죄에 대해서 죽음이고, 불세례는 혼(옛사람)에 대한 죽음이다. 옛사람은 변화의 대상이 아니라 죽음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3. 피의 의미

요한복음 654-56절『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피는 대속의 의미를 갖는다. 죄인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 어린양의 피를 취해 제단에 뿌렸다. 예수의 피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흘리신 속량의 피이다. 속량은 사탄의 노예를 피값을 지불하고 사는 개념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와 연합되는 것이 곧 피를 마시는 것이고, 성찬식때 포도주를 마시는 의식이다.

그리고 살을 먹는 것은 하늘생명인 부활에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에 따라 그와 연합된 자도 부활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세상의 육신으로부터 오는 혈에 대해서 죽고,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나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자는 그 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가 그분 안에 들어가고, 그 분도 성도 안에 들어와 역사하시는 것이다.

 

4. 성령세례

요한복음 133-34『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성령세례는 물세례와 불세례를 받은 자에게 주는 것이다. 물세례는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다.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세례(침례)라 하는데, 물에 잠기는 의식이다. 물에서 빠져 죽었다는 표현이다.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이다. 죄를 씻는 개념이 아니라, 죄가 죽은 것이며, 율법에 따라 판단받는 죄가 이제는 성립이 안된다는 것이다. 율법을 떠난 존재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불세례를 주신다. 불세례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갖게 되는 혼(옷과 같은 것)에 대한 죽음이다. 혼은 창세기 321절에서 가죽옷과 같은 개념인데, 육의 몸(fresh)이라고 한다. 로마서 64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육의 몸은 여기서 죄의 몸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은 물세례와 불세례가 포함된 의미가 된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 것은 대속(물세례)의 의미도 있지만, 죄인 본인이 죽었다(불세례)는 것을 의미한다. 신도가 예수의 피로 죄를 용서받은 것만 믿으면, 불세례를 받은 적이 없는 것이다.

희생양을 죽여서 피를 제단에 뿌리고, 그 살과 가죽을 불에 태우는데, 피는 물세례, 살을 태우는 것은 불세례에 해당된다.

물세례는 노아의 홍수 사건과 자주 비유되는데, 죄를 회개하지 않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불세례는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되는데, 다른 육체를 따라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유다서 17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ἑτέρας) 육체(σαρκὸς)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다른 육체라고 번역된 사르코스는 부모로부터 받은 몸(소마:껍질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들어간 육신(옛사람: 육의 몸, 죄의 몸)을 의미한다.

사르코스는 영이 육신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육신을 따라 가는 것은『육체 속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육적 마음)를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지주의는 인간 속에는 신성이 있는데,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찾으려고 하는 종교를 대표하는 것이다.

영지주의자에 대한 심판은 유다서에서 세번째로 거론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우상숭배가 심한 곳이었다. 이것은 영적 간음을 의미한다. 음란한 곳이라 표현되어 있는데, 대체로 영적 간음인 우상숭배를 의미하며, 당시 우상숭배할 때, 여사제와 성적 관계가 많았던 것에 대해서 이를 표현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 하나가 되는 것

 

1. 겟세마네 기도

요한복음 17 11절『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엔 토 오노마티 수)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원래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세상에 있는데,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해 달라는 것이다. 『엔 토 오노마티 수(ν τ νματ σου)』는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그 이름(호 로고스) 안에서 지켜 달라는 것이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성부 하나님이 지켜 달라는 말이다. 그래서 성도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성도들도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 이론이다.

요한복음 1714절『내가 아버지의 말씀(톤 로곤 수)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호 로고스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들(십자가와 현재적 부활을 믿는자)은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자들이다. 호 로고스의 사람들은 그 분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원하는 것은 성도들이 악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악에 빠지지 않으려면 호 로고스의 말씀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에 연합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716절『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세상에 속한 자들은 악에 빠진 자들이다. 세상의 악은 육체를 사랑하는 자이고, 그래서 세상을 사랑한다.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는 육적으로는 예수와 함께 죽고, 하늘로 부활생명의 몸이 들어옴을 믿는 자들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것 같이 제자들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721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성령으로 하나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성령으로 성부와 아들이 하나가 되듯이, 제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십자가 사역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앞으로 부활하는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어떠한 결과가 도래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다. 그 내용은『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처럼, 제자들과 그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되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와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5 30-32절에서『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창세기 2 22-24절에서도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고 있다.『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니라』본래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와 교회는 한 지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께로 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이시다. 아담으로 부터 하와라는 한 지체가 나왔다. 그 지체가 나오므로 한 몸이 아니게 되었다. 즉 두 몸이 되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남자(그리스도)가 부모(하나님)를 떠나 즉 세상에 있는 지체에 가서, 그 지체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로 데려온다는 말이다. 사도바울을 통해서 에베소서 5 30-32절에서 이 말씀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1722-23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하려 함이로소이다』성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려면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현재적부활에 참여하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즉 하늘로 부터 태어나는 자가 성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724절『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리스도를 낳으시고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리스도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어떤 일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게 된 것은 창세 전에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계획을 하신 것이다. 이것이 창세로부터 감추인 천국의 비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여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마태복음 20 28절에『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라고 했다.『대속물이라』함은 내가 가지고 있는 빚 또는 내가 마땅히 당해야 할 일을 다른 사람이 대신 해주는 것인데, 예를 들어 내가 빚을 갚을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대신 갚아주는 것을 대속이라 한다. 예수의 피값으로 대신 갚아주는 것이다.

요한복음 1726절 『내가 아버지의 이름(토 오노마 수)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그노리소)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2. 포도나무와 가지

요한복음 151-2절『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메 페론 카르폰)는 아버지께서 그것을(아우토) 제거해 버리시고(아이레이)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카다이레이) 하시느니라』

아이레이(αρει)는 들어올리다 라는 의미다. 제거해 버린다는 말은 번역의 오류다. 아우토(ατ)는 그 가지다.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가지가 된다. 메 페론 카르폰(μ φρον καρπν)열매를 아직 맺지 않은 이라는 의미다. 즉 열매를 아직 맺지 않은 가지는 들어올린다는 말이다. 들어올리기 위해서 가지를 고정대에 묶는다. 그래서 열매가 맺게 해 주는 것이다. 카다이레이(καθαρει)는 포도열매가 맺히면 열매가 잘 자라도록 주변의 보잘것 없는 열매들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즉 포도 알이 풍성하게 되기 위해서  솎아내는 작업을 깨끗하게 한다고 번역해버린 것이다. 개역개정으로 볼때,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있는 자도 열매가 없으면  잘라버린다는 의미가 되는데, 그렇지 않다. 열매가 없으면 열매가 맺도록 잘 관리해주는 것이다. 

요한복음 153-4절『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디아 톤 로곤)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디아 톤 로곤(δι τν λγον)은 심령 안에 새성전이 세워져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이미 깨끗해 진 자들이다. 즉 부활열매가 풍성하게 잘 열리도록 주변에 작은 열매들을 제거해 준 그 가지들이다. 그래서 호 로고스인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는 것이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부활열매를 맺는다.

요한복음 155-6절『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나무에 붙어있을 수 없는 가지가 된다. 예수님은 자신이 참 포도나무이며, 진정하고 순수한 포도나무이기에 예수님과 붙어 있지 않는 한, 부활열매는 맺을 수 없으며, 열매를 맺지 않는 포도나무 가지는 농부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모두 제거해 버리시고, 불태워 심판하신다는 경고의 가르침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나무에 붙어있을 수 없는 가지가 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이다. 너희는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 자인데,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만일 그렇게 떨어져 나온다면 마르고 불라살라진다는 것이다. 마르다는 말은 세상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고, 불사르는 것은 둘째 사망에 쳐해진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58절『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그래서 부활생명의 열매를 맺게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부활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심령 속에서 주인이 되는 것이다. 

 

3. 제자의 발을 씻기시다

요한복음 13 4-5절『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수건을 허리에 두르는 것은 종의 모습이다. 발을 씻는 것은 죄를 씻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먼저 시범을 보인 것은 제자들이 서로 이렇게 하라는 것이다. 성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 같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은 발씻기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제자들도 세상에 나가서 발을 씻기라는 것이다.

예수의 손과 제자의 발이 하나가 된다. 예수의 손은 권능을 의미하지만, 제자들의 발은 신도들을 열매맺게 하기 위하여 사역하는 발이 되는 것이다. 그 예수님의 권능이 제자들에게 가서 하늘 부활생명을 열매맺게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3 6-7절『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레게이)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우크 오이다스) 이 후에는 알리라(그노세)

레게이γει)는 현재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베드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후에는 알게된다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가 심령 속으로 들어올 때 그 음성을 듣고 죽은 영을 살리는 것이다. 이게 형제 사랑하는 일이다.  우크(οκ)는 부정을 의미한다. 오이다스(οδας)는 어떤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노스(기노스코)는 관계를 통해 아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와 그 분과 관계를 맺게 되면 알게된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13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우크 에케이스 메로스 메트 에무)

베드로는 예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전에 예수님은 죽고 삼일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리하시면 안되옵니다 라고 항변한 것이다. 우크 에케이스 메로스 메트 에무(οκ χεις μρος μετ’ μο)는 나와 함께 분깃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분깃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발을 씻기기를 거부한다면 나와 하나님 나라의 것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발을 씻기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분깃과 관계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분깃이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 13 9-10절『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비유의 말씀이다. 목욕한 자는 물에 들어가서 온 몸을 씻는 자를 표현한다. 물에 들어가는 자는 물세례 받는 것을 의미하여, 예수와 함께 죽는 자를 상징한다. 그런데, 제자들은 발을 씻기므로 앞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어 부활의 열매를 얻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자가 있다는 말이다. 바로 가롯유다를 두고 하는 말이다.

1311절『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미 탐욕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가룟 유다를 의식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가룟유다에게 경고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질 다른 제자들보다, 지금 식사를 함께 하고 있지만 스스로에게 속아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한 명의 제자로 인해 더 가슴 아파하고 계셨다.

요한복음13 12절『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기노스케테)』옷을 입는다는 말은 부활의 옷을 다시 입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 기노스케테(γινσκετε)는 관계를 통해서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관계를 통해서만 알게 되는 것이다. 섬기는 리더십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섬기는(코이오니아) 것은 낮추는 자세이다. 그 이유는 형제들에게 부활생명을 전해주기 위해서는 발을 씻어주는 낮춤이 필요하다. 이게 섬김이다. 형제에게 현재적 부활생명을 전해주지 못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아니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아니고,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되지 못한 자라고 말을 할 수 있다. 오늘날 육체가 죽어서 부활한다는 것을 신도들에게 잘못 전하는 자들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다.

요한복음 1313-14절『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주와 선생은 섬기는 자로서 사역을 하는 자 라는 것이다. 부활생명을 주기 위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분이 섬기는 예수님이시다. 오늘날 많은 교역자들은 섬김이 아니라 지배하려 하는 자의 모습을 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섬김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으므로, 제자들에게도 그와 같이 섬김의 사역을 하라는 것이다. 육체의 눈으로 볼 때, 섬기는 것은 마치 희생을 하고, 봉사하고, 노력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영의 눈으로 보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생명을 전해주는 일이다.

 

5. 복음 전파와 성도들의 위로

 

. 복음 전파

1. 내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 2115절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아가파스)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필로)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필로(필레오)는 친구간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아가페(가치에 대한 사랑)로 물었는데, 베드로는 필레오로 대답했다. 서로 촛점이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양을 먹이라고 한다. 주님의 어린양은 주님이 데려가야 할 양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베드로는 여전히 아가페의 사랑이 안된 상태로 보인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말씀하신다.

2116절에서 『다시 두 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필로) 줄 당신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여기서도 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다. 두번째 말씀에도 예수님이 보시기에 베드로는 여전히 아가페의 사랑이 안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말씀하신다.

2117절에서『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이스)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오)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엘뤼페데)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필로)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기노스케이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이번에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필레오로 질문했다. 네가 나를 친구로 생각하고 사랑하느냐 라고 물은 것이다. 기노스케이스(γινσκεις기노스코)는 관계를 통하여 아는 것이다. 아가페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의 그 가치(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를 의미한다. 그 가치를 깨닫는 자만이 성도의 심령 속에서 역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신도가 예수님을 필레오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 가치를 모르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 가치를 깨달았지만, 차마 그 분을 아가페로 받아드릴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안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의 눈 높이로 내려가서 필레오로 수정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베도로는 예수님의 이 말을 듣고 근심하게 된다. 엘뤼페데는 마음이 슬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세번째는 예수님께 아가페로 사랑한다고 말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므로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상태로 끌려가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상태로 내려왔다면, 부활하신 후에는 성도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상태로 끌려 올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십자가의 죽음에 머물러 있다면 곤란할 것이다. 예수님의 아가페의 근본적인 목적은 죽었던 영을 살리는데 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현재적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고, 현재적으로 부활과 연합되지 못하면 아가페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고, 아가페의 사랑을 전할 수 없는 자가 된다.

 

 

2. 일곱교회의 모습

요한계시록 11절『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아포칼륖시스)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게네스다이)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다. 이는 호데오스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넘겨준 계시의 근원이 호 데오스라는 것이다. 그의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빠른 시간 안에서 반드시 되어져야 할 일들을 그의 종 요한에게 그의 천사를 통하여 급히 진리를 세워 상징을 통하여 보이는 것이다.

아포칼륖시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서 요한계시록의 주제이기도 하다. 덮개를 제거하다 라는 말이다. 감추어 둔 것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언약궤를 열어버리는 것이다. 숨겨둔 돌판을 보여주는 것이다. 덮개를 열므로, 그 의미를 깨달았다는 말이다. 그 의미의 실체는 칠 언약인 것이다. 십계명으로 알려진 것은 계명이 아니라 십 언약이다. 칠언약을 십언약으로 알게되면 칠십이 된다. 십은 양적으로 완전수라고 하며, 칠은 질적으로 완전수라 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십언약인데, 이것을 통해서 칠언약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약을 계명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의 힘으로 이를 지켜보려고 한 것이다.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한 것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인 것이다.

성경은 언약에 관한 책이고, 창세기도 요한계시록도 언약에 관한 것이다. 언약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비밀이지만, 성령으로 깨닫는 자만 이 비밀을 알게되는 것이다. 게네스다이는 되어지게 하다(become)라는 의미다.

1 2『요한은 하나님의 말씀(톤 로곤 투 데우)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텐 마르튀리안 예수 크리스투)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에이덴)하였느니라』

“이는 호 데오스(성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넘겨주었던” 계시라는 것이다. 넘겨주는 절차는 호 데오스가 예수 그리스도(데오스: 호로고스)에게, 천사에게, 요한에게, 교회(종들)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이다. 톤 로곤 투 데우는 성부 하나님의 그 복음의 말씀이며, 십자가와 부활을 의미한다. 텐 마르튀리안 예수 크리스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의미한다. 에이덴은 보았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보았다는 것이다.

13『이 예언의 말씀(투스 로구스)을 읽는(아나기노스콘)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카이로스 엥귀스)

투스 로고스는 복수로서 말씀들이다. 관사가 없는 로고스는 말(talk하는 말)이다. 그런데, 관사가 붙으면,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복수로 될 때는 하나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아나기노스콘 (ναγινσκων)은 아나(위에서)와 기노스콘(알다:히브리어 야다)과의 합성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말씀을 알고, 듣고,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이다.

복은 영생부활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부활의 복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는 복을 “말씀(투스 로구스)을 읽는(아나기노스콘)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 세가지로 표현했다. 읽는 것은 문자를 통해서 위의 것을 깨닫고 알고 느끼는 것이다. 위의 것을 깨달은 자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말씀(십자가와 부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듣는 것은 예언의 말씀이다. 예언은 속히 일어날 일이다. 계시록은 묵시적인 성격을 띤 예언의 서신서이다. 그래서 묵시적인 표현과 역사적 사실적인 것들과 상징적인 표현들이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창세기(1-3)와 다른 서신서와 사도행전을 비교해 보면 유사한 표현들이 많이 등장한다. 계시록은 율법과 복음이라는 관점, 성전의 개념과 이해, 옛것과 새것이 어떻게 바뀌는가를 기본으로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성전으로 표현할 때 예루살렘 성전, 예수 그리스도, 성도의 심령 속의 성전으로 표현된다. 근본적인 하나님의 뜻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다. 이런 표현도 상징적인 것들이다. 계시록을 하나님 나라와 세상을 대비하여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나, 그것이 핵심은 아닌 것이다.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ν ατ γεγραμμνα) 기록한 것은 성도의 심령 속의 새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 새겨진 것(새성전:부활)을 잘 지켜라는 것이다.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때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때를 의미한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맥락이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전쟁의 대상은 나의 심령 속에 있는 다른 나(옛성전)인 것이다. 그래서 나를 부인한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에 순응하는 나(새사람)와 육체를 따르려고 하는 나(옛사람)의 싸움인 것이다.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오르코메노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헾타) (프뉴마톤)과』

아시아는 아침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새로운 시대를 나타낸다. 에클레시아(~강권하여 밖으로 불러냄)는 오늘날 교회라고 부른다. 세상 밖으로 불러내진 자들이다. 교회는 엑스도스된 자들이다. 모세가 바로의 왕궁으로부터 나오는 것, 성도가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오늘날 신도들이 모이는 것을 교회라고 말을 할 수 있는가? 이 말은 심령 속에 세워진 교회가 된 성도들이 모이는 것을 교회라고 할 수 있지만, 참 성도가 없다면 교회라고 볼 수 없으며, 마치 동아리 모임과도 같은 그런 곳이 된다.

교회는 여자로 비유된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정결한 다섯처녀인 것이다. 신랑은 씨(쩨라)를 가진 남자(자칼:언약을 기억하다)이다. 씨는 언약의 말씀의 씨이며,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통해서 요한을 통해 아시아 일곱 교회 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일곱 교회의 의미는 언약을 가지고 있는 성도를 의미한다. 창세기 1장에서 일곱째 날이 계시록에서 일곱 교회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 언약은 첫사람 아담으로부터 세상에 온 자들을 마지막 아담이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이제 오시려고 하는 분. π ν κα ν κα ρχμενος 』현재 존재하고, 미완료로 존재하고, 지금도 오고 계신 하나님이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고, 미래에도 오실 그 분이라는 번역은 잘못된 것이다. 에르코메노스(ρχμενος)는『오시려고 하는』(문법적으로 현재시제 중수디포테)이라는 의미다. 미래가 아니라 이제 오시려 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3 14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나는 스스로 있는자 (하야 아세르 하야)라는 표현은 헬라어로는 에이미(존재)가 된다. 하야 아세르 하야는 하늘의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온 존재의 하나님이시다. 하야가 현재이면서 미완료이고 지금도 역사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시제에 얽매이지 않는다.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헾타) (프뉴마톤)』보좌(드로노스) 먼저 보좌에 대해서 보면, 마태복음 5 34절에서『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하늘이 호 데오스의 보좌라는 것이다. 하늘은 단수로 사용되므로 보좌는 성전에 있다. 요한계시록 4 5절에서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일곱 등불(등잔대)이 일곱 영이다. 보좌는 일곱 등잔대 뒤에 있으므로 지성소에 있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있는 성전이나, 성막의 지성소나 같은 개념이다.

『일곱(헾타) (프뉴마톤)』은 일곱 등잔대라 했다. 일곱은 언약, 영은 말씀이다. 언약의 말씀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일곱을 통해서 구원을 말씀하시는데, 비진리의 인간들은 육으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 계시록에서 칠(언약)을 말하고 있다. 언약의 말씀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주어지는 것이다. 언약의 말씀이 없고, 율법으로 살아가면 은혜와 평강이 없다는 말이다. 언약을 성취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성도 역시 언약의 성취자가 된다. 언약의 성취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성도 역시 현재적 부활의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에 전하는 복음은 성도의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지게 하라는 말이다. 표면적으로는 세상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편지를 하라는 것이고, 더 나아가 일곱교회로 상징되는 모든 교회에 이 복음을 전하라는 말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성도 한사람 한사람의 심령 속에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므로 성도 역시 현재적 부활이 이루어져, 새성전이 세워지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들어가 그와 더불어 영적으로 먹고 사는 것이다.

 

3. 적 그리스도의 출현

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적그리스도에게 당할 수 있는 사람은 거듭난 자가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자다. 여기서 적그리스도는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율법주의, 인본주의, 영지주의 자들이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성경에서 종말 때에 멸망의 아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의 적그리스도는 멸망의 아들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번역 당시 적그리스도라고 말했으므로 에스카테(ἐσχάτη)를 마지막 때라고 번역한 것이다. 에스카테는 소망이 없는 때라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를 다니지만, 적그리스도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므로, 예수를 핍박하는 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2 19절『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우리에게서 나갔다』는 의미가 마치 그들이 교회 밖으로 나간 것으로 이해되지만, 여전히 그들은 교회 안에 있으며, 그러나 신앙공동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같은 신앙공동체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는 자가 된다는 의미다. 우리와 함께 거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같은 교회에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가 서로 섞여 마치 신앙공동체처럼 여겨지게 하는 것이다. 파네르도신(φανερωθσιν)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들이 어떤 신앙 생활을 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름을 부은 자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왕으로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거듭난 자에게 기름을 붓는 분이 된다. 성령세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자는 기름부음을 받지 않은 자가 되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주님이 거듭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성령세례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기 위해 주시는 특별한 은혜인 것이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면, 사마리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는 자는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아니므로 거짓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거짓선지자들은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십자가의 죽음이 과거의 죄만 용서받았지만, 현재와 미래의 죄는 다시 예수의 피로 용서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부활 역시 육체가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게 거짓 복음이다.

2 22-23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이 말은 교회 밖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거짓말하는 자를 말한다. 성령세례도 받지 않은 사람이 마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두고 요한이 지적하는 것이다. 이들은 삼위일체의 신앙을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 교회에서도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이라고 말을 한다. 이게 잘못된 삼위일체 신앙인 것이다. 삼위일체는 성부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성령으로 하나인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도를 빼고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세분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인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 교회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창조주), 성령 하나님이 각각 인격으로 존재하시면서, 서로 하나인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분이고, 그러나 한분이라는 논리로 설명한다. 이게 신학인 것이다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한분이시며, 성부와 그의 아들과 성도가 성령의 운행하심으로 하나인 것을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거짓선지자나 거짓교사에 대해서는 바울, 베드로, 야고보, 유다 역시 이를 지적한다. 특히 유다의 경우는 거짓선지자들이 행하는 잘못된 행위는 마치 하나님 나라에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못하여 흑암에 갇힌 자 같고, 발람과 같은 자이며,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때와 같은 자라고 했다. 베드로 역시 범죄한 천사가 지옥에 갇힌 자로 표현하고, 노아의 홍수때 멸망당한 자와 같다는 표현을 했다. 이만큼 거짓선지자들, 특히 오늘날 왜곡된 성경 말씀을 전하는 삯꾼 목사들이 적그리스도라는 말이다.

 

4. 거짓 선지자와의 전쟁

요한일서 41『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도키마제테)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아가페토이(Ἀγαπητοί)는『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아』라는 의미이고, 도키마제테(δοκιμάζετε) 분별하다라는 말은 철저히 검증해서 잘 판단하라는 의미다. 많은 거짓선지자가 나왔다는 말은 인본주의, 율법주의, 영지주의를 바탕으로 거짓복음을 전하는 자가 교회에 들어왔다는 말이다. 신도의 영적 전쟁의 대상은 사탄이 아니라, 사탄 아래 있는 거짓선지자들이다. 그들의 영을 판단해야만 한다.

4 2-3절『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기노스케데)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사르키)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기노스케테(γινώσκετε)는 알다(히브리어:야다)는 의미이며, 성령을 통하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마음이 성령의 감동으로 역사함을 의미한다. 사르키(σαρκ육신)는 성육신을 의미한다. 성육신은 임마누엘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육신을 하나님으로 생각하면 안되고 사람이신 그리스도라는 의미다. 육신 속에 하나님이 임재하는 것이다. 거듭난 성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성도 안에 들어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이 부분이 빠져 있는 사본들이 있다. 물론 빠져 있어도 문맥상 앞의 부분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임마누엘 신앙을 믿지 않는 자들은 성도의 임마누엘을 믿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고, 그 성전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들어가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 거짓선지자들이라는 말이다.

15-6절『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아쿠에이 헤몬)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세상에 속한 말은 기복적인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서 잘되고 물질적 축복을 얻게 하는 모든 것들이다. 아쿠에이 헤몬(ἀκούει μν)은 우리가 소유한 것을 듣고 라는 것이다. 헤몬(ἡμν)은 소유격으로 그 대상이 빠져 있는 것이다. 우리의 (   )에 대한 말을 듣고 라는 의미다. (  )는 진리를 전하는 성령이다. 자칫 잘못하면, 요한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들은 형제의 영을 살라는 자들이 된다. 영을 살리는 것이 사랑이며, 형제들은 서로 살아있는 영에 대해서 격려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기노스케이γινώσκει)은 하나님과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가페의 사랑, 즉 하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죽었던 영을 살리기 위함인 것이다. 그래서 부활의 열매가 되게 한다.

 

. 성도들의 위로

1. 세상을 이기는 것

요한일서 5 4절『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헤 피스티스 헤몬)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어, 현재적으로 부활되었음을 믿는 자이다. 성령으로 부활생명으로 거듭난 자를 의미한다. 세상을 이기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로부터 벗어난 자이기 때문이다.『헤 피스티스 헤몬』은 우리의 그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믿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5 5-6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의 증거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요한이 물과 피와 성령으로 설명하는 이유는 성부와 그의 아들, 그리고 성도가 하나됨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되는 자는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사탄의 지배를 받지 않고, 율법 아래에 있지도 않으며, 오직 성령께서 인도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영적 전쟁은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분별하는 것이다, 인본주의,율법주의, 영지주의가 대표적인 것들이다. 인본주의로는 기복신앙이 대표적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여전히 절기를 지키며, 십일조를 해야만 하고, 교회건물을 성전이라고 말들을 하고, 절기를 지키는 것, 날마다 회개하여 예수의 피로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는 등이다. 영지주의는 인간의 몸에는 신의 성품이 있는데, 열심히 신앙생활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과, 거룩해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거나 하는 말을 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부활을 죽었던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가르치고, 그러므로 신도들이 살아있을 때,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믿음이다. 현재적 부활을 통해서 세상을 이기는 자가 성도인 것이다. 현재적으로 부활하였음을 믿음으로 세상에 대해서는 상관없는 자가 된다는 의미다.

 

2. 보혜사

요한복음 1425-26절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보혜사(파라클레토스 παρκλητος)는 중보자, 위로자, 변호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요한복음 1416절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알론 파라클레로톤)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다른 보혜사를 말하고 있다.  

알론(λλον)은 약간 다른 것이고 파라클레톤(παρκλητον)은 옆에서 돕는 분이라는 의미다. 돕는 성령이 있는데, 또 다른 성령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두 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분인 것이다. 또 다른 돕는 분(알론 파라클레톤)은 성령을 의미하며, 원래의 돕는 분은 그리스도(보혜사)를 의미한다. 즉 예수님이 세상에 있으면서 돕는 역할을 했지만,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을 돕는 분으로 보내시겠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시게 되었다. 예수님은 체포당해야 하고, 십자가에 달려야 하고, 무덤에 들어가야 하고, 그리고 부활하고 승천해야 한다. 이제 잠시 후면 제자들이 지금까지처럼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는 없게 된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도 당황스러웠지만, 예수님은 육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시간과 공간의 활동에 제약을 받았지만, 에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제자들의 심령 속으로 재림하여 들어가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돕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일서 21절에서『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파라클레톤 παρκλητον)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셔서, 성부에게 중보자로서, 대언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시어 돕는 자가 된다. 이렇듯 삼위일체는 성부와 그리스도 성도가 성령으로 하나되는 것을 의미한다.

 

3. 천년왕국

요한계시록 204절『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프쉬카스)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에제산)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구약에서는 왕들이 재판하는 권한을 가졌으나, 신약에서는 성도가 재판하는 권한을 가진 것이다. 성도들은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이다. 베드로전서 2 9절에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12 47-48절에서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레마)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호 로고스)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왕노릇하는 방법은 목베임을 당하는 것이다. τν πεπελεκισμνων δι τν μαρτυραν ησοκα δι τν λγον το θεο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베임을 당하여"라고 번역되어 있으나, 예수를 증언함과 호 로고스(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목베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목베임을 당한다는 말은 이전의 목은 잘려 나가고, 새로운 목이 되었다는 말이다. 성도는 이전과 다른 존재라는 말이다. 이들은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이다.

『살아서(에제산)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에제산은 죽었다가 사는 것(거듭난:부활생명으로 태어나 자)을 의미한다. 즉 죽었다가 영적 부활생명으로 살아난 자들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프쉬카스는 영혼들이 아니라 혼들이다. 혼들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의미하는데, 목베임을 당한 자들은 이전의 혼이 죽은 자들 즉, 하늘로부터 오는 혼(영의 몸:부홯)을 받아서 부활생명으로 태어난 자를 의미한다. 그들은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사탄의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이 천년왕국이라는 것이다.

천년왕국은 천국의 다른 이름이다. 성도가 천국의 시민이 되면 그는 천년왕국에 있는 것이다. 천년왕국 또는 천국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마태복음에서 나타나는 천국(하늘나라)은 헬라어로『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으로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된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포괄적인 의미의 개념이다.

천국(천년왕국)은 성도가 육체가 살아있을 때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마태복음 3 2절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라고 말하는데,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것을 믿는 자이며, 그의 심령 속에 성전(지성소)이 세워져, 그리스도가 그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올 때, 천국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자, 성도의 심령 속으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들어온 것을 믿지 않는 자이며, 그에게는 천국이 임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0 1-3절『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타 에드네)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하나님이 천년 동안 사탄을 무저갱에 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이 활동하지 못하게 된다. 사탄이 죄인을 고소할 수 있는 권한이 일정기간 중지되는 것이다. 천년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통치의 개념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가 천년왕국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으로, 천년왕국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의미한다.

천년왕국이 되지 못하는 자는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들이다. 부활을 이루지 못한 자들인 것이다. 에베소서 2 2-5절에서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천년왕국의 교회인 성도는 하늘로부터 난 자로서 보혜사가 돕고 보호하시고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잠시 사탄의 기소권을 회복해 준다. 사탄은 여전히 죄인을 기소하는 것이다. 그래서 검사와 변호사는 다시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은 제자들인 성도 역시 사탄과 그의 사자들과 싸우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 승리하게 된다.

오늘날 교회 사람들은 천년왕국을 예수님이 지상재림하고,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칠년 대환란이 있을 것이고, 전천년, 후천년, 무천년설 등의 이론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말씀을 근거로 환란을 피할 수 있도록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이미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진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면 성도는 십사만 사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래서 성도의 심령 안에 있는 생명책에 여호와의 이름이 새겨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이름(십사만사천)이 새겨지는 것이다. 이게 천년왕국이라는 말이다. 천년왕국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상징적인 표현일 뿐이다.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나라, 바로 성도들의 심령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 대한 재림

요한복음 142-3절『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파라렘프소마이)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거처를 예비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집을 짓는 것은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임재하는 것으르 의미한다. 『내가 다시 와서』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 대한 재림이다. 파라렘프소마이(παραλμψομαι)는 파라(옆에서)와 렘프소마이(받아드리다)와 합성어이다.

1419절『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는데, 사십일간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 세상은 나를 다시 보지 못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 승천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보리니』그리스도는 세상에 다시 오지 않고, 성도의 심령 속으로 재림해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하는 자들은 보지 못할 것이나, 제자들은 보게된다는 것이다.

1420절『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삼위일체의 신앙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도가 성령으로 하나됨을 말해주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성도의 심령 속으로 재림해 들어가셔야만 삼위일체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삼위일체를 하나님에게민 적용시키므로 성도와의 하나됨을 빼버리는 결과가 된다. 이게 거짓선지자들의 말인 것이다.

갈라디아서 2 20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심령 속에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심령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이것이 성도에게 재림인 것이다.

 

2.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에 대한 심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심판 권한을 다 주셨는데,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심판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에게 백보좌 심판이 임한다.

요한계시록 2011-12절『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네크루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에르가)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백보좌 심판을 나타낸다. 심판은 그리스도께서 하신다. 심판을 하는 분에 대해서, 마태복음 16 27-28절에서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죽기 전에 심판받는 자들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믿는 자이다. 이들은 이미 둘째 사망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물세례로 노아의 홍수와 같이 죽었고, 불세례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죽은 자인 것이다. 그래서 하늘생명으로 부활시켜 주신 것이다.

요한복음 5 27-29절에서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육이 죽고 난 뒤에 둘째 사망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심판받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의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라는 말은 율법에 따라 기록된 대로 심판받는 것이다. 단 하나라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심판의 대상이 된다.

두 종류의 책이 있다. 어린양의 생명책과 다른 책들이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에르가)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책들은 행위들에 대한 책들이다. 생명책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책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없는 자들은 다른 책들에 의해 심판을 받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심령에 생명책을 발견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2013절『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에르가)대로 심판을 받고.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는 바다가 죽은 자를 내준다고 한다.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다. 내준다는 말은 심판에 처해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하는 자들은 말씀으로 심판하는 것이다. 심판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들이 한 말과 심중에 기록된 것에 따라 심판한다.

요한복음 5 29절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선한 일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고, 악한 일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이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자기가 주인인 것이다.

2014-15절 『사망과 음부도 불못(헤 림네 투 퓌로스)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사망과 음부도 불못(헤 림네 투 퓌로스)에 던져지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 속에 생명책이 있다. 생명책이 없는 자는 율법으로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받는다. 생명책이 있는 자는 미리 사망과 불못에 던져진다. 사망에 던져지는 것이 물세례이고, 불못에 던져지는 것이 불세례이다.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둘째사망)을 의미한다. 옛사람의 죽음이다.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심판받은 것이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자는 음부에 들어가 둘째사망의 심판에 처해진다. 첫째사망은 베드로후서 2 4절에『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타르타로)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로 표현되었다. 지옥이라고 표현된 타르타로는 영이 육체 속에 갇힌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므로 지옥에 있는 것이다. 현재적 지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천국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천국과 지옥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

요한계시록 20 6절에서『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은 대조된다. 하데스는 음부를 의미하는데, 음부에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 둘째 사망을 받는다. 둘째 사망은 성령의 불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0 15절에서『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κα ε τις οχ ερέθη ν τ βίβλ τῆς ζωῆς γεγραμμένος, βλήθη εἰς τν λίμνην το πυρός. 여기에서 휴레데(ερέθη: 발견하다) 라는 말이 번역되지 않았다. 누구든지 생명책에서 이름을 발견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진다는 말이다. 생명책은 모든 사람의 심령 속에 있지만, 그 생명책을 펼쳐서 이름(여호와)을 발견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지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심판한다는 말이다.

교회 신도들은 예수의 재림을 신도들을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공중재림해서, 그들이 휴거되고, 남은 자들은 칠년 대환란을 맞게되고, 그리고 칠년이 지나면, 예수님이 지상재림해서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이다. 사람마다 대환란이 재림 전인가 후인가 아니면 무천년인가 등의 이론을 제시하지만, 다 부질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성도에게는 이 모든 것이 현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가 재림해서 심령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구름을 타고』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나타낸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육체가 죽어서 심판을 받겠지만, 현재적으로도 지옥(첫째 사망)에 사는 것이다. 영이 흙에 갇혀있으므로 지옥인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모든 사람에게 현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육체가 죽어서도 연장되는 일이다. 현재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천국이 되며,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지옥이 된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가 회개하여 불세례(둘째 사망)를 받아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천국이 되고,

그렇지 못한 자는 현재가 지옥이며, 육체가 죽은 후에도 음부에서 둘째 사망을 받는데, 둘째 사망을 받기 위해서는 둘째부활이 이루어져 불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첫째 부활은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을 의미한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05-6절에서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

그러나 둘째 부활은 음부에 있던 자가 심판을 받기 위해 심판의 부활의 옷을 입는 모습이다. 요한복음 529『선한 일(타 아가다)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아나스타신), 악한 일(타 파울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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